티스토리 뷰



짧은 문장들이 뭉치면서 하나의 묵직한 주제를 만들어낸다. 문장들에 날이 서 있다. 집을 나온 제이가 아이들과 함께 사는 대목에서는 래리 클락의 영화 <키즈>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는데 자극적인 소재를 소설로 다룰 땐 어디까지 어떻게 취해야 할지를 고민해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경우엔 묵직한 문장들로 인해 자극적인 부분의 날것 그대로의 묘사가 많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리얼리티를 얻을 수 있었는지 혹은 리얼리티가 죽었는지는 실제 이 아이들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세계를 잘 모르는 나같은 독자들에게는 글의 무게 덕분에 읽기 불편하지 않았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의 한없이 가벼운 문장들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다름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제이라는 아이는 마치 마늘을 먹으면 곰이 사람이 된다는 그런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전설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뭔가 사연이 많을 법한 인물이다. 책을 읽는 중간에는 그 아이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난 뒤에는 그런 아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말그대로 하늘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막연한 느낌이 더 강하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동규)는 돼지엄마가 데려온 제이와 함께 자랐다. 제이와 영혼까지 공유하는 사이라고 믿고 있는 동규는 어릴 적 함구증을 앓고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때마다 제이는 나의 통역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제이가 내 의중을 알고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제이가 통역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제이라는 영혼의 틀에 갇힌 것이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사이 돼지엄마가 다른 남자를 데려오자 제이는 집을 나갔다. 아니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래 자신이 태어난 곳인 거리로 돌아간 것이다. 제이는 거리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뒤 다시 나타나더니 결국 아이들의 신이 됐다. 어떻게 보면 참 종교적인 이야기다. 집을 나가 수양하고 성인이 된 부처가 떠오른다. 차이점이라면 부처가 나무 아래에서 수양을 한데 반해 제이는 난교하는 아이들에 섞여 지내다가 걸인처럼 떠돌아다녔다는 것. 그는 남들이 버린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키워나갔다. 김기덕 영화 <사마리아>의 아이들처럼 그에게 섹스는 구원이다. 작가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제이와 Y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는 이야기도 결국 그것이다. 반항하고 싶지만 유혹을 거부할 수 없는 Y라는 여자에게 제이의 섹스는 성적 판타지도 아니고 긴장감 가득한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고속터미널은 이 책에서 중요한 장소이다. 수많은 고속버스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곳은 제이의 고향이자 자궁 같은 곳이고 제이가 거리의 신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소이다. 폭주족의 리더가 된 제이는 대폭주의 날에 광화문에서 한남대교를 지나 테헤란로까지 가지만 결국 고속터미널로 가지 못하고 성산대교 아래 경찰이 깔아놓은 바리케이드에 쓰러져 하늘로 솟구친다. 자크 라캉의 언어로 말하자면 금지된 것을 넘어선 고통스러운 쾌락인 '주이상스'를 넘어서 '죽음에의 충동'으로 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책에서는 제이가 정말로 죽은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서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시점이다. '나'가 제이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시점이 혼란스럽다. 나와 제이가 헤어진 뒤에 제이의 이야기는 더이상 내가 제이를 관찰하며 쓴 것이 아니다. 제이를 관찰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에필로그에서는 작가인 또다른 '나'가 등장해 전혀 다른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렇게 한 작품에서 다양한 시점을 넘나드는 것은 약간 어리둥절한데 (개인적으로 일관성이 없는 이런 방식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너무 편리한 방법처럼 보여서 거부감이 든다) 김영하는 한 인터뷰에서 시점을 유지하는 것을 정작 독자들은 크게 신경쓸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시도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동규가 제이를 떠올리면서 필자인 나에게 털어놓는 말이다. 제이가 사라진 뒤 동규는 소울메이트라고 믿었던 제이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제이를 배신했던 동규의 죄책감이기도 하고 영혼의 통역자를 잃은 상실감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그런 감수성들이 김영하의 묵직한 문체에 무겁게 매달려 있다.


PS)

아이들이 PC방에서 게임만 한다고 나무라는 사이에 PC방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PC방에 갈 비용을 벌기 위해 앵벌이를 하거나 몸을 파는 아이들이 있다. 한국 사회에 가출 청소년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혼률과 이혼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1,2위를 다투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쉼터가 전국에 고작 90개 정도, 인원으로 따지면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즉, 19만 9천명은 거리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부처간 업무 떠넘기기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데 학교를 떠난 10대 청소년은 교육부 담당이지만 가출 청소년은 여성가족부 담당이어서 결국 어디서도 제대로 담당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10대들의 강력범죄가 뉴스가 되면 어른들은 혀를 끌끌 찰 뿐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해결책은 누구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눈감고 싶고 피하고만 싶은 사이에 무서운 아이들은 자라고 있고 더 많아지고 있다. 소설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는 너무 교훈적인 것 같아서 나도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인과응보'다. 언젠가 이 아이들은 한국사회에 더 큰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12.02.28
상세보기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