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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은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말 그대로, 화면이 아름답습니다. 구도도 좋고 가만히 멈춘 카메라의 롱테이크와 그 속의 소박한 연기들도 좋습니다. 구도를 보면서 오멸 감독이 미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미술을 전공했더군요. 또 원 씬 원 커트로 찍은 장면들의 연극적인 느낌도 좋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구덩이에 한명씩 모여드는 장면, 동굴 속에서 마치 최후의 만찬처럼 마을 주민들이 감자를 나눠먹고 불끄고 잠들 때까지의 롱테이크는 이 영화의 최고 성취입니다. 그리고 또 한 장면, 동굴 내 어둠 속 패닝(혹은 트래킹) 쇼트는 긴장감이 넘칩니다. 주민 한 명 한 명의 표정이 살아 있습니다. 패닝으로 긴장감을 만들어낸 솜씨는 미클로스 얀초의 <붉은 시편>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민중들이 모여서 춤추고 저항하고 군인들이 둘러싸고 총 쏘는 장면들을 패닝과 자유로운 핸드헬드로 담아낸 <붉은 시편>을 기억하시나요? 몽타주와 미장센이 서스펜스의 모든 것이 아님을 증명했었죠. 아, 물론 <지슬>의 그 장면이 그 정도까지 엄청났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강렬했다는 말입니다.


또, <지슬>은 마치 동구권에서 만든 예술영화 같습니다. 비전문 배우가 등장하는 시적인 장면들에선 알렉산더 소쿠로프 영화 같기도 했고, 상징적인 흑백화면들에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 같기도 했으며, 감자가 만드는 은유라는 면에선 송일곤이 폴란드에서 만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간과 감자>를 떠오르게도 했습니다. 감자와 돼지가 영화 속 주요 상징으로 쓰였는데 공감가는 설정이었습니다. 돼지를 끓이던 솥에 사람이 들어간 장면은 아주 직접적으로 상징적인 장면이었고, 죽은 할머니에게 가져온 감자를 주민들이 나눠먹는 장면에선 감자가 민중과 생명력 자체를 나타낸다는 것을 감자의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의 주제와 아주 잘 어울렸고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칭찬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사실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고, 영화의 만듦새 또한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지슬>은 그다지 임팩트가 있었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한국 독립영화계의 대단한 성취라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다만, 이건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겠죠. 왜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이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는지, 혹은 아직까지 이 정도로밖에 못하는 건지 아쉬웠습니다.


1969년 볼리비아 우카마우 집단의 <콘돌의 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볼리비아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편 것을 비판한 영화인데 비전문 배우인 농민들이 출연한 제3세계 전투적 민중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플래식백 등 당시 이해하기 어려운 기법을 사용해 정작 영화를 봐야하는 농민들은 이 영화를 어려워했습니다. 또 영화 속에서 미국의 평화봉사단이 왜 불임시술을 하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는 비슷한 문제점을 <지슬>에서도 발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슬>은 상징적인 장면이 많은 영화입니다. 물론 마을 주민들이 등장하는 장면의 대사에서는 대중적인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상징적인 장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점이 오히려 제주 4.3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한계로 작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이렇게 박제된 역사가 되기엔 아직 아픔이 많은 사건입니다. (심지어 어느당에서는 당시 제주도민들을 폭도라고 규정한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 과장해도 모자란 사건입니다. 아직 누구도 나찌의 학살을 소재로 이렇게 상징적인 영화를 시도하지는 않지 않나요?



1948년 4월 3일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 제주도 남로당의 무장단체가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횡포에 반발해 경찰서를 공격합니다. 미군정은 폭도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반공단체를 증파하고 이날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라산이 개방된 1954년까지 거의 6년 동안 제주도는 숨쉬는 것조차 두려운 섬이 됩니다.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제주도민들까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죽였습니다. 최소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인 3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1949년 4월까지는 대학살의 시기였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1948년 12월이 주요 배경입니다만 서북청년단은 미쳐 날뛰었고 수급을 가져와야 전과를 인정받았기에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또 강간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UN 남한정부 승인을 앞두고 제주사건을 빨리 정리하려고 11월 17일 제주도 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사실 이 계엄령은 불법이었습니다. 당시 제헌헌법에는 계엄령 조항이 없었거든요. 일제가 만들어놓은 법을 근거로 했다고 하는데 제헌헌법에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했으니 자기모순인 셈이죠. 당시 참상을 증언한 다음 글을 보시면 아픔을 짐작이나마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청이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도 있었습니다.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엔 그 냄새로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 선생은 나의 약혼녀인데 한달만에 풀려나와 보니 정 선생은 차아무개라는 서북청년단 간부와 결혼해 있더군요. 날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겁니다. 현재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정 선생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4.3사건의 끔찍한 실체는 영화 속에 천분의 일도 담겨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가 또 나온다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는 점점 더 직접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복수의 총을 겨누는 <26년> 같은 영화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슬>은 희생자들을 향해 제사지내는 데 그쳤습니다. 한으로만 그리기엔 영화가 너무 약했습니다. 절제의 미학이라고 하지만 미학을 말하기엔 당시의 참상이 너무 잔혹하네요. 유럽에서 나치의 만행을 가지고 미학적인 시도만을 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1938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이고 제주 4.3사건은 1948년의 일입니다. 겨우 3년 간격을 두고 유럽과 한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간참사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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