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실존 인물을 그린 영화를 볼 때마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갈등이 생긴다. 그것을 왜 담지 않았냐고 물어야 하는 것인지 혹은 왜 그것을 담았냐고 물어야 하는 것인지. 프로이트와 융이라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대가를 다룬 이 영화는 욕심이 많은 영화는 아니다. 그들의 이론을 복잡하게 떠벌여놓고 감당 못할 플롯에 빠져 허우적대며 수습하기 어려워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하다.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 역시 실존인물인 사비나 슈필라인. 그녀는 러시아 유태인으로 후에 소련의 아동심리학자가 되는 인물이다. 그녀가 융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벌여주었다면 그럴싸한 멜로드라마 소재가 되었겠고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렸겠지만 우리가 사비나라는 이름이 낯선 것만큼 그녀는 융의 정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플롯을 갖고 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첫 멜로드라마라고도 불린다. <엑시스텐즈> 이후 10년 넘게 크로넨버그는 다른 사람이 쓴 각본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도 그중 하나다. 존 커의 소설과 크리스토퍼 햄튼의 희곡이 원작으로 햄튼이 직접 각본도 썼다. 문제는 멜로드라마치고는 이야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나아가기 힘들었을 수 있겠지만 사비나와 융의 관계는 멜로드라마로 감상하기엔 너무 조심스럽다. 융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가정도 지키고 싶어하기에 관계가 더 발전되지 못한다. 그 주인공이 융이라서 특별하다고 해도 정작 이야기는 너무 심심하다. 그렇다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멜로드라마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대체 무엇에 관한 영화일까?


처음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제대로 된 멜로드라마를 보여주지 않았냐고 묻지 말고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를 물어 보자. 시대적 배경은 1903년부터 1911년 사이. 융이 프로이트의 후계자를 자임하며 'Talking Cure'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던 시대에서 시작해 두 사람이 사소한 의견 차이로 갈라선 뒤 끝난다. 융은 사비나를 치료하고 그녀는 의사가 된다. 영화 속에서 사비나와 프로이트가 만나는 장면은 딱 한 장면이다. 프로이트가 사비나의 논문을 본 뒤 그녀를 부른다. 그리고 충고한다. 융을 너무 믿지 말라고. 그 이유는 사비나와 프로이트는 모두 유태인이라 탄압받는 정신분석학을 이해할 수 있지만 금발의 아리아인인 융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당시에는 막 태동하기 시작한 정신분석학 자체가 위험한 학문이었고 그것을 이용한 치료는 '데인저러스 메소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미신으로 깎아내리려는 세간의 평가에 맞서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지나치게 섹슈얼리티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와 결별한다.



키를 쥔 인물은 사비나다. 그녀는 바그너의 발퀴레에 심취해있다. 바그너는 히틀러도 숭배했던 예술 극단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 그녀가 아리아인인 융을 숭배하며 그에게 때려달라고 말하는 것의 배경에는 이런 인종적인 사도마조히즘이 깔려 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접근은 그러나 후반부에 사비나의 주장에 의해 부정된다. 프로이트는 성욕은 쾌락에의 욕구라고 말하지만 융은 성욕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며 반대한다. 이에 대해 사비나는 성욕은 개인성의 파괴이며 자아는 그러한 충동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즉, 성욕에의 저항은 개인적인 것이지 사회적 통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통념이 아니더라도 성욕은 자아의 파괴를 요구한다.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오토 그로스(뱅상 카셀) 같은 사람은 마음껏 성욕을 해소할 수 있지만 도덕관념에 사로잡힌 융에게 섹슈얼리티는 해방구가 아니라 또다른 감옥일 뿐이다.


<쉬버스 Shivers>의 난교 파티, <플라이>의 스트레스 해소용 섹스, <크래쉬>의 자동차 충돌과 성적 흥분 등 영화 속에서 섹슈얼리티를 강조해온 크로넨버그가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면 아마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오토 그로스의 말처럼 성에 대한 억압은 인간에게 몇 가지 되지도 않는 즐거움을 막고 있다. 그것을 치유하려고 하는 행위는 위험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쉬버스>에서 미친 과학자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주려고 기생충을 만든 것처럼, 혹은 <크래쉬>에서 인간과 기계의 충돌에 집착해 죽음까지 감수하는 모임을 만든 전직 과학자처럼. 두 과학자는 결국 모두 죽는다. 그러나 사비나는 말한다. 파괴적인 힘들이 충돌할 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고. 1900년대에 파괴적인 힘들은 편견에 맞서 정신분석학을 태동시킨 추진력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를 크로넨버그의 전작 <폭력의 역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섹슈얼리티의 역사' 정도가 되는 셈이다.



칼 융의 마이클 파스벤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비고 모르텐슨, 사비나 슈필라인의 키이라 나이틀리. 세 사람의 연기는 정말 훌륭하다. 마이클 파스벤더의 섬세하고 예민한 표정은 시종일관 융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보도록 만들었다. <폭력의 역사> 이후 크로넨버그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고 있는 비고 모르텐슨은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학자 역할에도 잘 어울린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어쩌면 밋밋한 정부 역할일 수도 있었는데 어릴적 성적 학대에 시달렸던 정신병을 지닌 여자 의사 지망생 연기를 확실한 임팩트 있게 해냈다.


마지막으로 오토 그로스 역의 뱅상 카셀. 그는 단 두 씬에 출연하지만 영화는 그의 등장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르다. 융이 말한대로 그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의 등장 이전에 섹슈얼리티는 언어에 그쳤다면 그가 자유로운 성에 대해 연설을 늘어놓고난 뒤의 영화는 확실히 성적인 긴장감이 다르다. 크게 자극적인 노출씬이 없는 이 영화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섹슈얼한 서스펜스를 제공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