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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 원제도 좋고 한글 제목도 괜찮고.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말에 혹해 읽기 시작한 책. 작가는 줄리언 반즈. 이 책의 화자 만큼이나 꽤 할아버지. 잘 몰랐지만 읽고 나니 스타일을 알 것 같다. 세심하게 감성적이고 소소하지만 통찰력 있는 글.


이 책은 소설이지만 소설스러운 회고록이고 또 메타 역사책이다. 메타 역사책이라고 한 것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소설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파트리크 라그랑주를 인용해 에이드리언이 한 말) P.34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화자가 1960년대에 보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 10대 때 3명의 절친이 있었고, 에이드리언이 전학 와서 넷이 어울렸다. 그들과 철학 이야기를 하며 뭔가 멋지게 보이는 말들로 허세를 자랑하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가게 되며 네 친구는 뿔뿔히 흩어졌는데 주인공 토니는 브리스톨에 있는 대학에 가서 베로니카를 사귀게 된다. 베로니카라는 여자. 그녀는 팜므파탈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남자를 안달나게 하는 여자다. 모든 엄마들이 아들에게 "여자 조심해야 돼" 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그런 여자. 심지어 베로니카의 엄마마저도 토니에게 베로니카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첫 여자친구이지만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일 뿐이다. 토니는 베로니카를 세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는데 그중 가장 똑똑한 엘리트이고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는 베로니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여자는 두 종류가 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P.116


베로니카는 어느날 토니에게 결별 통보를 한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난 뒤 어느날 에이드리언에게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좋은지를 묻는 편지가 온다. 토니는 어떤 답장을 보냈을까? 분명한 것은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토니의 기억 속에서 그가 보낸 편지는 추억 속의 윤색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P.162

토니는 미국 여행을 떠나고 베로니카를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 그러던 어느날 세 친구 중 한 명에게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살이란 그들의 철학에 의하면 이론의 완성이었다. 1급 인생의 1급 자살.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 젊어서 자살한 생이 완벽할까 아니면 늙어버린 생이 값진 걸까. 토니는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딸을 얻고 딸이 또 결혼을 했다. 이제 토니는 대머리 할아버지가 되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 P.101


2부는 살아남은 자인 토니의 현재이다. 토니가 자신과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속한 역사를 기록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만 남았을 뿐이다. 토니가 1부에서 기록했던 확신이 깨어지면서 소설은 반전을 준비한다. 토니는 어느날 변호사에게 연락을 받는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토니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것.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토니는 딱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딸과 잠깐 사귄 것이 인연의 전부인 노부인이 왜 토니에게 유산을 남겼을까. 재미있는 것은 유품 중 하나가 바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라는 것.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쯤 되면 어떤 예감이 드시는가? 당신의 뇌리에 어떤 부도덕한 예감이 들고 있다면 그 예감은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 그래? (베로니카가 토니에게 하는 말)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베로니카가 갖고 있다고 한다. 엄마의 유품을 자연스럽게 보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일기장을 토니에게 줄 생각이 없다. 다시 만난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여전히 미스테리의 여자다. 그녀는 토니에게 힌트를 주는 듯하더니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하지만 토니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법적으로 싸워볼까 생각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할지 의문이다. '돌싱'이 된 토니는 다시 베로니카에게 끌리고 있는 걸까. 그때 베로니카는 토니가 예전에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여준다. 그 편지에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젊은 날의 치기와 흥분과 질투로 가득한 글. 토니가 1부에서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달리 그의 과거는 치졸했다.


노년이 되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비행기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 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P.182

평균적인 외모와 평균적인 경력의 평균적인 인생. 토니가 자신에 대해 술회하며 하는 말이다. 그런 그에게 에이드리언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세 친구 모두 에이드리언과 가까워지고 싶어했다. 에이드리언이 없으면 그 모임은 유지될 수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 나처럼 평균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을 것이다. 아무리 쫓아가려 해도 쫓아갈 수 없는 경쟁자, 그러나 여전히 친구. 아마도 그런 복잡한 감정이 토니로 하여금 과거를 그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토니의 말처럼 역사는 결국 살아남은 자의 회고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내 인생과 에이드리언의 인생을 비교하고 있었다.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에 대해, 자살을 감행한 정신적, 육체적 용기에 대해.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 - 살아남은 우리 - 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짧은 장편소설은 책장이 쉽게 넘어가다가 중간에 멈칫 하다가 다시 넘어가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여유가 넘치면서도 이야기를 직조하는 힘이 있다. 쉽게 빨려들어가면서도 대단히 논리적이어서 앞에 장황하게 설명했던 역사나 철학이나 수학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뒷부분에 다 설명이 된다. 다만 1부의 회고록에 비해 2부의 이야기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낭만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토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송두리째 뒤집는 것을 보며 소설의 세계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토니는 그것이 거부하고 싶은 현실처럼 느껴졌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엔딩은 사실 좀 뜬금없었다. <올드보이> 만큼의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 법도 한데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잘 써진 좋은 소설이다. 2부는 잊고 1부만 다시 읽고 싶은 나는 현실도피자인걸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양장)
국내도서
저자 :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 최세희역
출판 : 다산책방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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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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