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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단숨에 읽어내려간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끈적끈적한 동어반복적 문체가 처음엔 쉽게 읽히지 않지만 적응이 되면 오히려 다음 문장을 예측할 수 있어서 더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이승우는 사건 하나를 설명할 때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 일이 갖는 의미에 대해 두 번 세 번 곱씹어 보고 충분히 설명한 후에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대단히 작위적으로 보이는 소설의 인물들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산속에 숨겨져 있던 천산 수도원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섯 가지 이야기가 펼쳐지고 스릴러식 구성 끝에 소름 돋는 실체가 드러난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개인적으로 낯선 세계여서 사실 초반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예수'라는 단어 대신 '주님'이라는 말만 나와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책에서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성서의 원형에 가깝다. 구약에서 누이를 범한 암논, 동생의 복수를 하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 등 상징을 그대로 가져와 한국 현대사에 접목시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카타콤'과 '체메테리움'이다. 초기 기독교시대의 비밀 지하묘지를 뜻하는 카타콤은 순례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소설에서는 독재자에 의해 생매장당하는 비극적 결말상징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카타콤을 쉬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무덤을 죽은 자들의 장소라는 뜻의 '네크로폴리'라 부른 로마인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속죄의 인생을 사는 후와 한정효는 집단매장당한 자들을 각각 일흔 두 개의 방에 묻어주는데 그 과정이 체메테리움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두 사람이 순교자들을 위해 벽에 쓰는 성경 구절은 이들을 위한 '지상의 노래'였던 셈이다.


소설은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형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천산 수도원을 답사하며 논문을 준비하연구자 강상호,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관한 글을 쓴 차동연, 권력자(아마도 박정희)의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김형욱처럼 비리를 폭로하는 대신) 수도원에서 속죄의 길을 선택한 한정효, 천산 수도원의 생매장을 지시받고 실행한 이야기를 훗날 차동연에게 털어놓는 군인 장, 겁탈당하고 버림받은 사촌 누나 연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고 있던 후. 공교롭게도 다섯 명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모두 속죄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상호는 형을 위해, 장과 한정효는 죽어간 순교자들을 위해, 후는 연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그 믿음들은 순수하고 종교적이다.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을 한순간에 해치워 버린 후에 남는 생의 공허를 어쩔 것인가. 평생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은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한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이다. 일을 위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끝남과 동시에 삶이 끝나기도 한다. 일을 끝냈으므로 삶을 끝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삶을 끝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일을 끝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아니다... (중략)... 선명하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살기 위해 그 일을 필요로 했다. 살기 위해 그 일이 그에게 있어야 했다. 그 일이 없으면 그의 삶이 위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역시 선명하게 의식하지 못했고, 그편이 훨씬 나았지만, 그의 삶을 위해 그 일은 한없이 연장되어야 했다." (245페이지)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 아니,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자들이 세상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핑계로 수도원에 모인다. 그들에게 그곳은 언젠가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일 뿐이다. 더 좋은 곳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들은 세상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것들을 묻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서 잊혀져 갔고 잊혀지기를 원했다. 한 권력자가 그들 사이에 섞인 위험한 자를 제거해야겠다고 인식하기 전까지는.


거룩한 주제에 비해 겁탈당하는 연희의 이야기나 권력자의 부하였던 한정효의 이야기가 너무 고리타분해서 초반부에는 읽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마지막 챕터에서 30년을 사이에 두고 두 가지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작가는 아마도 한국 현대사를 하나의 성서적 원형으로 보고 속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던 것 아닐까. 죄의식 없이 세상을 무릎꿇린 권력자의 시대, 강간당한 자가 오히려 도망가야 하는 시대, 권력자의 부하였던 한정효와 사촌누나를 겁탈하려는 생각에 괴로워한 후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장면은 두 비극적 역사의 상징적인 만남이다. 헤어진 그들은 한참 뒤 다시 천산 수도원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상의 노래가 담긴 벽서로서 이미 죽은 자들에게 속죄한다. 한정효가 후에게 건네는 아래의 말이 따뜻한 위로로 들리는 것은 그 속죄에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찮은 것이 자주 위대한 것을 이겨요. 말씀들이 이 무자비하고 막무가내의 현실을 무너뜨리고 이기고 지배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요.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대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그러니까 그 때문에 절망하거나 마음 상해하거나 넘어지지 마요." (291페이지)



지상의 노래 (양장)
국내도서
저자 : 이승우
출판 : 민음사 201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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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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