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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영화시장이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극장개봉을 위한 시장 외의 또다른 시장 말이다. 이것은 블록버스터와 비블록버스터의 구분 혹은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구분과는 또다른 개념이다.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아동영화와 어른을 위한 성인영화라는 구분과도 다르다. 온가족이 함께 모여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 극장에서 보기에는 너무 작고 뻔하지만 명절에 TV로 보기에는 아주 좋은 영화, 어느날 어딘가에서 우연히 영화가 상영중이라면 보지 않기에는 아쉬운 영화, 구청이나 동네 마을회관이나 도서관이나 심지어 양로원, 고아원이나 혹은 비행기에서 부담없이 단골로 상영되는 영화. 대부분 전체관람가 혹은 높아야 12세관람가. 그런 영화들의 시장이 있다. 아, 물론 원래부터 그런 시장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따로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거기에 어울리는 영화들이 있더라는 말이다. 아직까지 TV 방송국이나 비행기나 구청만 노리고 영화를 만들기에는 수지가 안 맞는다. 그러나 가족영화의 장점은 설령 극장에서 망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끝난게 끝난게 아니라고 위안을 삼고 반전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이다. TV나 구청은 배신하지 않는다. 명절은 항상 돌아오고 야하거나 센 영화는 가족과 함께 보기엔 민망하다. 양로원은 늘어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구청에서 열어주는 영화감상회를 기다린다. 이렇게 기본적인 수요가 항상 있다. 즉, 든든한 보험을 하나 들어놓고 있다고 할까.


예전부터 VOD 시장만 노리고 극장에서 단 한 타임만 상영한 뒤 극장개봉작이라는 타이틀로 TV나 컴퓨터 모니터로 직행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수입영화이거나 한국영화더라도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자극적인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면 지금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족영화는 그런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주인공의 팬이라면 모를까 사람들이 굳이 돈 내고 다운로드 받아 보지 않는다. 그대신 다함께 모여서 본다. 그래서 주로 단체 관람을 한다. 극장이 아니어도 좋다. 동사무소 구청 보건소 기업 도서관 등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소재 면에서 다른 영화들과 다르다. 일단 착하고 또 보편적인 정서에 기대고, 때론 가부장적일 정도로 보수적이다.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린 아이와 엄마나 아빠가 주인공인 눈물 쏙 빼는 가족영화(엄마와 아빠는 함께 나오진 않는다. 그러면 비극이 될 수 없을테니까). 또하나는 나쁜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는 착한 코미디로 주로 한 젊은이가 사회와 가족에 순응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전자는 김혜수의 <열한번째 엄마>, 송윤아의 <웨딩드레스>, 신현준의 <마지막 선물>, 탁재훈의 <어린왕자>, 박용우의 <파파>, 최강희의 <애자>, 박진희의 <친정엄마>, 엄정화의 <마마> 같은 영화들이고, 후자는 <복면달호> <과속스캔들> <위험한 상견례> <완득이> <음치클리닉> 같은 영화들이다. 예전엔 전자의 눈물샘 자극하는 가족영화들의 흥행이 잘됐다면 요즘에는 후자의 코미디가 더 먹힌다. 이런 경향으로 본다면 <음치클리닉>이 제목만으로도 너무 뻔하고 내용으로는 더 뻔한 설정으로도 어떻게 제작이 될 수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극장에서 적당히 해주기만 하면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음치클리닉>의 극장 개봉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전국 관객 고작 33만 명. 전망좋은영화사의 전속(?) 감독인 김진영 감독의 전작 <위험한 상견례>가 260만 명을 기록한 것에 비교해보면 속절없는 추락이다. 원인이 뭘까? 라고 묻기도 전에 '기획'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런 기획의 영화가 흥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어쩌면 기획할 땐 잘하면 <복면달호> 정도의 중박 혹은 운 좋으면 <미녀는 괴로워> 같은 대박을 노렸을 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계속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미녀는 괴로워>처럼 여성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 가족영화의 카테고리에 더 가깝다. 그 점을 놓친 것이 이 영화의 패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가족영화면서도 마치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케팅을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 로맨틱 코미디를 노렸다면 소재가 음치클리닉이어서는 안 됐다. 음치클리닉은 말그대로 시트콤에나 어울리는 배경 아닌가. 더군다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자장가 불러주고 싶은 엄마, 회식때 노래 잘 하고 싶은 회사원, 가수가 되고 싶은 중학생들이 나올거라면 그건 정말로 가족 시트콤이다.


이 영화를 투자/배급한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작년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적 있다. <음치클리닉>의 실패가 작년에 처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작년 초여름에 개봉했던 (가족영화는 아니지만 비슷한 코미디 영화인) <아부의 왕>도 롯데 작품이다. 최종 관객 수 49만 명으로 다른 한국영화 다 잘될 때 혼자 안됐던 쓰라린 패배를 겪었던 <아부의 왕>은 코미디는 코미디인데 어떤 코미디인지 관객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기엔 밋밋하고 회사원의 애환을 코믹하게 담았다고 하기엔 목적이 불분명했다. 물론 가족 코미디도 아니었다. <아부의 왕>이 기획된 배경에는 <위험한 상견례>로 반짝 스타덤에 오른 송새벽이라는 배우가 있었다. 그 영화 역시 유치하긴 해도 우스운 에피소드가 빛을 발해 흥행에 성공했지만 <아부의 왕>은 송새벽의 떨어진 약발 때문에 유치한 에피소드만 남았다. 그러나 배우의 신비감이 떨어진 것 외에도 두 영화의 흥행의 선을 가른 것은 기획의 차이다. <위험한 상견례>는 가족에 포지셔닝 됐지만 <아부의 왕>은 이도저도 아니었다. 애초에 타깃이 달랐다는 말이다.



다시 <음치클리닉>으로 돌아와보자. 극장에서 실패한 <음치클리닉>은 TV에서 클리닉이 가능할까? 물론이다. 박하선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처럼 과장된 표정을 짓고 연기하는 그녀는 스크린보다는 TV 화면에 더 잘 어울린다. 포지셔닝을 잘못한 기획은 문제이고 그래서 극장 흥행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치클리닉>은 온가족이 함께 볼만한 가족영화로는 썩 괜찮은 코미디다. 긴장감도 풍부하고 착한 웃음도 곳곳에서 터진다. 아마도 명절에 TV나 동네 주민들이 모이는 각종 영화감상회에서 이 영화를 자주 접하게 될 것 같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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