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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연재를 시작한 영국 만화 [저지 드레드]는 이미 1995년 헐리우드에서 대니 캐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습니다. 2135년 핵폭발 이후 탄생한 거대도시 '메가시티 원'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그래서 경찰이 거리의 재판관으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죠. 실베스타 스탤론이 유전자 변형으로 탄생한 저지 드레드로 나오는데 강력한 심판관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가 살인 누명을 쓰고 경찰들에게 쫓기게 됩니다. 유전자 결합 과정에서 저지 드레드와 함께 탄생한 비밀병기가 악당이 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한 인물의 야누스적인 면을 또하나의 테마로 삼았습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냐 하는 문제를 곁다리처럼 짚다가 결국 질서를 잡는 경찰재판관의 위상을 확인하며 끝납니다. 저는 당시에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습니다만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흥행은 그다지 잘 되지 않았죠. 하지만 무엇보다 어두운 미래세계를 구현한 화면은 멋졌습니다. 영화 속에서 사이버 섹스 장면이 처음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실베스타 스탤론과 다이안 레인이 헬멧을 쓰고 서로 접속하는 장면은 당시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대니 캐논 감독은 그 이후 CSI 시리즈의 기획, 연출, 각본을 맡으며 대박을 치게 되죠.


<저지 드레드>가 17년 만에 돌아오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헐리우드의 옛 영화들 리부트 열풍 덕분입니다. '리부트'란 리메이크와 비슷한 개념인데 기존 영화를 캐릭터와 배경만 남기고 전혀 새로운 컨셉트로 재창조하는 것이죠. 리메이크라고 부르기엔 너무 많이 달라서 컴퓨터 용어를 빌려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대성공이 리부트 열풍을 몰고 왔고요. <인크레더블 헐크> <슈퍼맨 리턴즈>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등이 리부트된 영화들입니다. 올해엔 <토탈 리콜>과 <저지 드레드>가 있었습니다. 곧 <미이라> <반헬싱>도 새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2012년의 <저지 드레드>는 1995년 영화가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원작이 탄생한 영국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배급사는 캐나다의 라이온스게이트. 감독은 <엔드 게임>의 영국인 피트 트레비스, 주연은 뉴질랜드인 칼 어번과 미국인 올리비아 썰비. 이쯤되면 영국을 중심에 놓고 영어권 국가 출신이 모여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왜 국적배경을 설명하냐면 이 영화가 드물게 볼 수 있는 영국 SF영화이기 때문이죠.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도 있었지만 거기엔 미국 자본이 더 많이 들어갔습니다. 헐리우드 대형자본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지 드레드>의 예산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1995년작이 흥행에서 실패한 탓에 부담감이 있었겠죠.


적은 자본으로 만들어서인지 사실 이 영화에는 미래사회를 표현했다고 할 만한 장면이 별로 없습니다. 상점 같은 곳도 지금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95년작에서처럼 진화한 과학기술을 담은 장면들을 기대했습니다만 그런 눈요기거리를 선물하기에는 영화의 꿈이 소박했던 것 같습니다. 감독에게도 적은 예산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겠지요. 이 영화는 마치 저예산 독립영화가 하는 것처럼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액션! 액션입니다. 러닝타임도 95분으로 짧은 편이고 영화를 찍은 장소도 빌딩 안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두 주인공이 갇히게 되고 마치 <다이하드>처럼 혹은 <레이드: 첫번째 습격>처럼 주인공이 그 빌딩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악당들을 찾아 죽여야 임무가 끝납니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플롯이지만 영화는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매트릭스>나 <인셉션>이 했던 것처럼 총격전에서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슬로모'라는 약을 마시면 1초를 100초처럼 느끼게 됩니다. 카메라는 이것을 빌미로 고속촬영을 감행합니다. 그 장면들은 마치 총맞은 것처럼 황홀합니다. 200층 고층빌딩에서 낙하하는 장면의 슬로모션, 총알이 얼굴을 관통하는 장면의 슬로모션은 빠르게 흐르던 영화의 템포를 인위적으로 늘어뜨리면서 오히려 심장을 조여옵니다. 이 장면들 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이 멋진 장면들을 3D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3D에서는 어떻게 표현됐는지 궁금하네요.



2012년작은 1995년작과 줄거리와 캐릭터가 전혀 다르지만 배경은 비슷합니다. 그곳은 핵폭발로 황폐화된 미래의 미국 동부입니다. 뉴욕-보스턴 등이 하나로 합쳐져 8억 명이 사는 거대한 '메가시티 원'이 만들어졌습니다. 곳곳에 엄청나게 큰 빌딩들이 들어서 있는데 외관상으로는 멋진 미래사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업률 95%에 모든 도시가 슬럼화된 디스토피아입니다. 거리에서는 시위와 폭동이 끓이지 않으며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회는 어떻게 굴러갈까요? 해답은 5%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주인공 드레드는 법의 수호신으로 범법자들을 쫓는 경찰이자 그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재판관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면서도 헬멧을 쓰고 다녀 영화 내내 맨얼굴이 공개되지 않는 칼 어번이 굵은 중저음 목소리로 드레드를 연기합니다. 그와 달리 여주인공 올리비아 썰비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사용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헬멧을 쓰지 않습니다. 미모의 여주인공을 배려한 영리한 전략이긴 하지만 처음엔 <엑스맨>의 돌연변이와 비슷한 설정이라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건물에 갇히고 나니 그 극악무도한 폭력의 세계에서 여주인공에게 뭔가 색다른 능력 하나쯤은 있어야 전사 이미지가 아닌 여성으로서 돋보일 기회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탕작전이 벌어지는 200층 대형건물의 이름은 '피치트리.' 번역하면 '복숭아나무'인데 구혜선 감독의 영화제목으로도 쓰였지만 아마도 로알드 달의 동화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리스마스 악몽>을 만든 헨리 셀릭 감독에 의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는데 한 아이가 거대해진 복숭아를 타고 뉴욕으로 가고 싶어하는 이야기였죠. 영화 속에서 과거 뉴욕이었던 '메가시티 원'에 장대한 '피치트리' 빌딩이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복숭아를 보는 듯 그로테스크합니다. 피치트리의 지배자는 창녀 출신의 갱두목 마마입니다. 인정사정 없는 잔인함으로 빌딩의 조직을 통일해버린 여자. 레나 헤디가 마마 역을 맡았는데 여성 두목으로서 화면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보통 슬럼가라고 하면 낮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어서 갱들이 어느 구역을 접수하고 있다는 것이 수평적인 개념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수직적인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마마가 무서워서 다른 드레드들은 들어오기를 꺼렸던 피치트리 빌딩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주인공 저지 드레드와 드레드가 되고 싶은 여자 인턴 앤더슨이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강직한 성품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시련이 닥쳐오고 관객이 굳이 고민할 필요없는 명확한 선악의 구분 속에 드레드의 신무기를 앞세운 화려한 액션 씬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채웁니다. 어설프게 늘어놓느니 한가지에만 집중하는 전략은 효과가 좋습니다. 비록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영화가 추진력을 잃고 강렬했던 마마 캐릭터에도 힘이 빠지면서 늘어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1995년작보다는 훨씬 명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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