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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알아.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어. 처음엔 잠깐 다니려고 했어. 첫 월급 타면 그만두고 다시 써야지 했는데... 다음달 월급이 들어오고 또 승진을 하고 그러고 나니까 책임감이 생기고 더 그만두기 어려워지더라고."

"그거 알아? 난 네가 쓴 시 참 좋아했어."

"메이, 내가 처음부터 널 사랑했다는 걸 지금이라도 증명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동하,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걸까?"

"무슨 뜻이야?"

"깜박 잊었다. 증거는 찾았어?"

"찾는 중이야."

"넌 항상 그랬어."


광장에서 군무를 추던 두 사람은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기 위해 한 가게 앞에 선다. 두보의 싯구처럼 반가운 비가 때를 알아 봄이 되니 내린 걸까. 미국 유학시절 함께 문학을 공부하던 두 사람. 몇 년 만에 중국 청두에서 재회한 그들은 추억에 젖는다. 그때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걸까? 모두 어렸고 수줍은 고백이 있었고 오해가 있었고 속앓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저 멀리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 그는 3일간의 짧은 출장을 와 있고 이 순간은 곧 지나가버릴 것이다. 지금 내리고 있는 소리없는 비처럼.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에는 쉼표가 많다. 주인공이 집 안에서 고민하거나 대나무숲을 산책하는 장면에서의 쉼표 뿐만 아니라 몇몇 컷들은 아예 인물들이 멈춘 상태에서 시작한다. 가령 인력거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이 멈춘 상태로 대화를 나누다가 전통 중국식당으로 가자고 말한 뒤에 자전거가 움직이고 카메라가 패닝하는 식이다. 식당에서도 두 사람이 다른 곳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은 후에야 웨이터가 등장해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엔 쉼표가 어색했다. 그런데 자꾸 반복되는 걸 보면서 이것이 의도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컷이 시작할 때 항상 인물이 움직이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 좋은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하기보다 맞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순간을 쉼표에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영화 속에서 인물이 멈춰 있는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카메라는 또 두 사람을 함께 잡는다. 원샷 보다는 대부분의 장면이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투샷이다. 어깨에 걸치든 마주보든 어떻게든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한다. 춤추는 장면에서도 춤은 각자 따로 추지만 고원원이 춤출 때 멀리 아웃포커싱으로 정우성이 지켜보고 있다. 투샷은 확실히 로맨스 영화에서 감정선을 연결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덕분에 영화 내내 두 사람의 감정선이 흔들리지 않는다. 또 시점 변화도 자유롭다. 남자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후반부에는 여자의 시점으로 옮아가는 이 영화의 특성에도 부합한다.


영화는 두 배우의 매력적인 얼굴을 시샘한다. 고원원은 정면에서 웃는 얼굴과 왼쪽 얼굴이 예쁘고, 정우성은 얼굴 뿐만 아니라 신체 비율이 좋아서 풀사이즈로 잡을 때도 멋지다. 카메라는 이 근사한 피사체를 탐내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씩 떨면서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려고 욕심부리지만 연출은 카메라를 항상 투샷으로 물러나게 한다. 공항에서 다시 만나 체류기간을 연장한 뒤 남자의 호텔방에 들어온 첫 장면을 보라.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을 관조한다. 여자는 갈등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키스한다. <외출>에서도 비슷한 사이즈의 화면이 있었는데 호텔방이라는 은밀한 공간에서 카메라가 널널하게 남녀를 담으니 확실히 로맨틱하다기보다는 긴장감이 살아난다. 이 영화는 육체적으로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감정선 만으로 사랑의 퍼즐을 맞추는 영화다. <외출>에서는 육체적인 사랑에 탐닉하느라 감정선을 결합하는데 실패했지만 <호우시절>은 경계선을 넘지 않으니 그 퍼즐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자전거, 팬더, 바람개비, 돼지내장탕면(페이창펀)... 이 영화에 아쉬운 점은 소재가 지나치게 단순한 취향이라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클래식> <여친소>를 만든 곽재용 감독 상상력 수준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치하리만치 몰개성적이다. 쓰촨성 청두와 두보초당을 공간 배경으로 설정해놓고 겨우 이 정도 수준의 상상력이라니. <봄날은 간다>의 분홍빛 치마나 붐 마이크는 어디로 갔으며, <8월의 크리스마스>의 TV 작동 매뉴얼을 달력종이에 적던 디테일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남녀 사이의 감정 로맨스로는 탁월하지만 소재 면에서는 관광객 영화 이상으로는 무리겠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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