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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과 광대


<왕의 남자>에 이어 또 왕과 광대 이야기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가 왕을 대놓고 조롱했다면 이번에는 둘이 서로 뒤바뀌어 광대가 진짜 왕노릇을 한다. <왕의 남자>가 연산군이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묘호를 받지 못했지만 21세기 들어서 나란히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두 비운의 왕들. 공통점은 두 왕이 포악해진 이유가 왕보다 더 센 숨은 권력자 때문이었다는 것. 왕은 막강해보이지만 그저 권력자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왕을 풍자하면서 관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치 광대의 희극에 즐거워하는 당시 백성들처럼 통쾌해한다. 정치풍자 코드가 들어간 조선시대 왕과 광대 이야기. 이쯤되면 남북관계 코드에 이어서 충무로의 또다른 대박 흥행공식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르겠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하기 한 달 전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비슷한 소재(세자와 노비)로 개봉했지만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관객 수 79만 명(손익분기점 230만 명)이라는 저조한 기록 속에 스크린에서 내렸다. 충무로에서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나란히 개봉하며 맞붙은 적이 처음은 아니다. 저멀리 2000년 <동감> <시월애>에 이어, 2007년 9월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즐거운 인생>, 2008년 1월 <원스 어폰 어 타임>과 <라듸오 데이즈> 등. 그동안 도토리 키재기 식의 비슷비슷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극과 극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장규성 감독이 <선생 김봉두> <이장과 군수> 등 따뜻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이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추창민 감독이 <마파도> <사랑을 놓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맞대결의 결과가 궁금했다. 그런데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만듦새와 공감대 모두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완승으로 끝났다. 아마도 세종 보다는 광해군이 지금의 대중들에게 더 어필하는 시대인 모양이다.





2. 광해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눈 내리는 종묘로 시작한다. 왕의 신위 35위가 모셔져 있는 이곳에 광해군은 초대받지 못했다. 조선의 왕임을 인정받지 못한 상징적인 장소를 비추면서 영화는 광해군을 재평가받아야 할 왕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엔딩 자막으로는 쐐기를 박는다. 광해군 8년(1616년) 2월 28일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숨겨야 할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는 말과 정초본에서 사라진 보름 간의 기록이 상상력의 기초다.


광해군은 왕이 되기 전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서인들에게 배척당했다. 선조는 노골적으로 명과 백성에게 신임을 받는 그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인과 함께 그를 독살하려고 했고 그를 대신할 새로운 왕자를 생산해 그를 세자에서 끌어내리려고도 했다. 성군의 싹을 보인 세자이면서도 왕인 아버지에게 미움 받은 광해군은 아마도 왕이 되기 이전부터 정치의 더러움을 몸소 겪은 왕일 것이다. 그래서 선조 사후 뒤늦게 왕이 된 광해군이 개혁가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에게 믿을 것은 서인 정권이 아닌 백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당한 독살 위험 때문인지 그는 의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복동생까지도 죽였다. 결국 서인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는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 이면에는 개봉시기가 대권 시즌이라는 점이 큰 몫을 했다. 이미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광해군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되던 왕 아니었던가. 더구나 영화 내용 자체도 사회풍자를 넘어 상당히 정치적이다. 왕이 난폭해져 백성들의 존망을 잃던 시기, 그 왕을 대신하기 위해 나타난 가짜 왕이 진짜 왕보다 더 왕처럼 보인다. 가진 자에게 더 거두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명-금과 등거리 실리외교를 펼치는 정치적 수완은 물론이고,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신하들에게 당당히 할 말을 한다. 내관, 중전, 나인에게 사랑받고, 심지어 가짜를 데려온 도승지 허균은 그에게 진짜 왕이 되도록 만들어주겠다고까지 말한다.


어쩌면 대놓고 순진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 그러나 대중들의 눈높이에 딱 맞게 만들어낸 재능이 영화를 흥행 성공으로 이끌었다. 스토리의 원형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왕자와 거지]가 오해받는 왕자에게 독자들이 연민을 느끼고 어서 빨리 궁으로 돌아가 왕이 되기를 응원하게 만드는 데 반해, 이 영화에서 관객은 광대 하선에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후에는 도망가지 말고 진짜 왕이 됐으면 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픽션을 뛰어넘는 역사왜곡까지 되었겠지만 뭐 어떤가. (이 영화가 참고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는) 이반 라이트먼의 <데이브>에서는 가짜가 결국 진짜 대통령이 되지 않던가.





3. 현실과 이상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도입부부터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2.35:1의 넓은 화면에 등장한 광해와 나인들. 바닥에는 밥상이 엎어져 있고 왕은 나인들을 노려보면서 누가 독을 넣었는지 추궁한다. 클로즈업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스크린을 뛰쳐나올 것 같은 독기를 품는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드러낸 영화는 내내 그 기운을 잃지 않는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비결이 화면으로는 클로즈업이라면 이야기로서는 등장인물의 범위를 최대한 좁히는 것이다. 영화는 소수의 인물에 최대한의 상징을 부여한다. 예컨대 사월(심은경)은 핍박받는 백성을 대변하고, 도부장(김인권)은 가짜 왕을 의심하다가 충성하는 충직한 신하를 대표하며, 박충서(김명곤)는 왕과 허균에 맞선 최대 권력자를 통칭하며, 중전(한효주)은 정치의 희생양이자 이 영화의 유일한 로맨스를 담당한다. 이들의 뛰어난 연기와 어두운 조명 속에 드러나는 고급스런 고증, 그리고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 들리는 배우들의 대사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선사한다. 확실히 이병헌, 류승룡, 장광, 한효주 모두 목소리가 좋은 배우들이다.


이병헌은 처음 하선으로 등장한 장면에서 왕과 너무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어서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이후로는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연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광대 하선일 때는 수염을 다르게 했다가 왕이 되면서 똑같은 수염을 붙이는 방식으로 했으면 덜 헛갈리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가 처음 왕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왕을 그대로 흉내내는 장면의 연기는 이후 자연스럽게 관객이 그를 가짜 왕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병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차분하게 절제한 류승룡(허균), <도가니>의 철면피를 완벽하게 지운 장광(조내관), 중전으로서 극의 품격을 더한 한효주도 좋았다. 웃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하선의 요구가 계속됐기에 후반부에 멀리서 마주친 중전이 웃는 모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영화는 그렇게까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허균이 하선이 떠나는 배를 보며 절을 함으로서 이 영화가 로맨스보다는 군신 관계 혹은 우정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영화 속에 궁에서 유생들이 왕을 막아서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처음에 광해는 그들에 막혀 뒷걸음질치지만 후반부에 가짜 왕 하선은 그들의 등을 밟고 넘어 중전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친 뒤에 마주친 것은 결국 막다른 담벼락.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사람들은 둘 중 어떤 왕을 원할까.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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