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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포스터, 케이트 윈슬렛, 존 C 라일리, 크리스토프 왈츠. 네 명의 연기의 신이 뉴욕의 집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80분의 러닝타임을 리얼타임으로 연기한 <대학살의 신>.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헤자의 희곡을 로만 폴란스키가 배경을 뉴욕으로 바꿔 만들었다. 스티브 부세미의 <인터뷰>,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배리드>, 변혁의 <주홍글씨>의 후반부 등이 생각나는 이런 종류의 영화는 배우의 엄청난 연기 내공과 밀도 높은 각본이 필수. 거기에 연극을 영화로 옮겼기 때문에 연극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까지. 다행스럽게도 <대학살의 신>은 이 조건들을 두루 갖춘 영화다.


아이들 간의 싸움을 해결하러 온 교양 있는 두 부부. 한쪽은 공구점을 운영하는 남편(마이클)과 아프리카에 관한 글을 쓰는 아내(페넬로피)이고, 다른 한쪽은 엄청 바쁜 변호사 남편(앨런)과 투자회사에 다니는 아내(낸시)다. 물가 비싼 뉴욕 답게 모두들 맞벌이 부부인 그들은 한 아이가 나무 막대기로 다른 아이를 때려 이빨 두 개를 부러뜨린 이유로 페넬로피 부부의 집에서 만났다. 영화 제목인 '대학살의 신 Carnage'는 극중 변호사 남편 앨런이 아프리카에 관한 글을 쓰는 페넬로피를 비꼬면서 내뱉는 말인데 아프리카 콩고에서 아이들이 살육병기가 되는 상황과 뉴욕으로 대변되는 문명사회에서 한 아이가 나뭇가지로 때린 것이 같은지 다른지 묻는다. 그곳이나 여기나 모두 약육강식의 사회. 결국 다른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자신의 아이를 콩고 아이들과 같은 '미치광이(매니악)'라고 말하는 앨런과 아프리카의 비극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페넬로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다른 종류의 사람이고 바로 거기서부터 갈등이 끓어오른다.


사실 그들은 원만하게 합의하며 사건을 끝낼 수도 있었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까지 갔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 게 몇 번이나 된다. 그럴 때마다 그놈의 교양이 그들을 다시 붙들어맨다. "비밀 레시피의 코블러 맛 보시겠소?" "그러지 말고 커피 한 잔 하고 가세요." "좋은 스카치가 있는데..." 그러다보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불만은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사소한 계기로 그들은 점점 교양이라는 위선 속에 감춘 자기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감정의 단계가 하나씩 올라가는 것을 구분하는 장치는 음식이다. 사과와 복숭아로 만든 코블러가 신호탄이었다면, 에스프레소 커피는 서서히 열을 데우게 하고, 마침내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며 폭발한다.


낸시가 페넬로피가 아끼는 책 위에 토하고 마이클이 헤어드라이어로 열심히 책을 말리는 장면과 낸시가 앨런의 휴대폰을 물에 빠뜨리고 마이클이 다시 헤어드라이어로 열심히 휴대폰을 말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유쾌한 댓구다. 자신의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을 누구와도 비교당하고 싶지 않은 페넬로피는 아끼는 책 한 권에 쩔쩔매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며 제약회사의 변호를 맡은 앨런은 휴대폰이 망가지자 인생의 전부를 잃은 것처럼 절망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장난감이 망가져 속상한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영화는 두 부부에서 남자와 여자로 전선을 바꿔가며 그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전반부보다 후반부에서 그들이 다들 편안해 보인다는 점이다. 꽁꽁 싸맨 외투를 벗고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내던져놓은 듯하다. 낸시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라며 튤립을 내던지고, 페넬로피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라며 울부짖지만, 소파에 앉아 스카치를 한 잔씩 마시고 있는 그들은 웬지 모르게 편안해 보인다. 앨런은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됐고, 마이클은 싸움을 애써 중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낸시는 낯선 집 거실 한복판에서 양동이를 들고 다니며 토를 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고, 페넬로피는 남편을 두들겨패며 자신이 결혼생활로부터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어놓았다. 그들은 모두 진흙탕에 빠질 때까지 속살을 드러냈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힐링의 경험 - 현대사회에서 이런 만남이 가능하다면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만남이다. 아마도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은 일정 부분 치유되지 않았을까?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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