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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한다."

17세기 수학자 페르마는 빛이 최단 시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로 움직인다는 것을 규명했다. 빛은 직선으로 뻗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 물 같은 매질에 부딪히면 굴절된다. 이 굴절 현상은 빛이 최단 경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를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이 어떤 매질에 부딪혀 휘어지면 시간도 휘어진다. 그러니까 빛은 직선이 아니라 최단 경로를 찾아 움직이고, 이때 빛이 휘어지면 시간도 휘어진다.

 


중국계 미국인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해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이 만든 영화 '컨택트'(2016)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어느 날 외계 우주선이 지구 상공에 나타나자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연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들을 만난다.

인간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언어에는 시제가 있어 인과 관계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계열을 따르지 않고 한 문장 안에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빛과 함께 시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시작점과 끝점을 연결하면 그것이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될수록 루이스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동시에 보게 된다. 소설은 이를 모호하게 묘사하지만, 영화는 동그란 모양의 시각 이미지로 이들의 언어형태를 효율적으로 명확히 보여준다.

 


그런데 한 문장을 말할 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헵타포드 언어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시계열 언어에 익숙해져 있어서 시계열 방식으로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려 했기에 난관에 부딪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나는 밥을 먹는다"라고 하면, 내가 밥을 먹었던 모든 과거와 앞으로 밥을 먹을 모든 미래가 보이는 것일까?

"나는 학교에 간다"라고 하면,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을 한 눈에 파악하게 되는 것일까?

"루이스는 딸을 낳는다"라고 하면, 그녀가 딸을 임신했던 과거와 앞으로 딸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미래를 모두 알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헵타포드의 문장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행동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를 제거하면 그 행동의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되어 하나의 잔상으로 수렴된다. 그게 헵타포드의 문자다. 예를 들어 사진을 찍을 때 노출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면,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변하지 않는 것들만 남는다. 사진작가 김아타는 2005년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8시간 장노출로 촬영했는데 결과물에는 움직이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그들의 잔상만 남았다. 김아타는 그 텅 빈 공허함이 뉴욕이라는 도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단지 둥근 원으로 보였던 헵타포드의 언어가 너무나 완벽하게, 또 한편으로는 매우 공허하게 느껴진다. 과거, 현재, 미래를 인과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영겁의 시간을 포괄하고 있는 원 안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토록 막강한 헵타포드의 언어를 만약 인간이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외계인이 떠난 뒤 루이스가 헵타포드어 강사가 돼서 서울에 어학원을 차려 초급과정부터 가르친다면 나는 그 학원에 등록할 것인가?

잘 모르겠다. 알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한편으론 이 언어를 배우고 나면 가뜩이나 허무한 인생이 더 허무해질 것 같기도 하다. 언어학자 사피어와 워프가 주장한 것처럼 언어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한 인간 역시 반드시 그럴 것이다. 딸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딸을 낳아 키우는 루이스는 생명의 존엄성을 성찰한 위대한 엄마이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숭고한 인간이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본다고 주장하는 신들린 무당 중에 행복한 무당을 본 적 있는가? 내 기억 속의 그들은 죄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래를 알게 되면 처음엔 너무나 신기하겠지만 곧 예정대로만 진행되는 사건들이 시시해질 것이고 어느 순간 변하지 않는 미래가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나는 그 예견된 미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을 진화시켜온 욕망이라는 본성은 이제 예견된 미래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 '인 타임'(2011)을 떠올렸다. 이 영화는 25살 이후 생명의 시간이 1년으로 고정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미래 사회의 이야기다.

사람들의 손목에는 바코드를 닮은 숫자 표시기가 박혀 있는데 여기에는 남은 인생이 시간, 분, 초 단위로 표시된다. 손목 위 시간은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처럼 거꾸로 간다. 사람들은 이 숫자가 0이 되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내가 죽을 날을 아는 사람들은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면서,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갈까?

 

인 타임


영화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다. 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타깃이 된다. 강한 자들은 흡혈귀처럼 타인의 시간을 빨아들여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

그렇게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또 다른 정글이 된다. 수백 년씩 시간을 연장해둔 초상류층 사람들은 혹시라도 다쳐서 아프지 않기 위해, 건강하게 천 년 만 년 살기 위해 몸을 최대한 보호한다. 이들은 몸이나 정신에 무리가 가거나 모험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은 시간을 독차지한 사람들과 없는 시간마저 빼앗긴 사람들로 나뉜다. 상류층은 자신의 생활공간을 분리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하류층은 상류층이 어디 사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분노도 하지 못한다.

 


'인 타임'을 떠올려보면 '컨택트'의 헵타포드 언어가 만약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또 다른 헬 게이트가 열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높은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없을 테니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두렵다.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헵타포드의 언어가 없다는 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미래는 그저 미래로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

 

 

* 매거진 bbb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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