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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패터슨은 패터슨에 살면서 패터슨에 관한 시를 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흠모하며 패터슨에 관한 시를 쓰는 버스 드라이버다.


말장난 같지만 이런 반복되는 패턴은 이 영화의 콘셉트다. 영화는 비슷한 장면과 무늬를 반복한다. 패터슨은 출근하면서 똑같은 길을 지나가고, 매번 똑같은 쌍둥이를 손님으로 태우고, 폭포 옆 똑같은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퇴근 후엔 똑같은 시간에 불독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서 똑같은 바에서 맥주를 마신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가 만드는 옷, 커튼, 벽지, 컵케이크에도 똑같은 패턴의 무늬가 반복된다.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쓴다. 집의 지하에 꾸며놓은 작은 서재에서도 쓰고, 점심시간 벤치에서도 쓰고, 잠들기 전 침대에서도 쓴다. 그가 쓰는 시는 일상에 관한 것이다. 네모난 성냥갑에 적힌 글자에 대해 쓰고, 길거리 사람들에 대해 쓰고, 폭포에 대해 쓰고, 잠든 아내에 대해 쓴다. 칸트처럼 정교하게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도 그는 운율이 정확히 맞는 시는 싫어한다. 글자들이 적당히 여유를 갖고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을 선호한다.


영화는 월요일에 시작해서 화, 수, 목, 금, 토, 일요일을 거쳐 다시 월요일 아침으로 이어지며 끝난다. 월, 화, 수, 목요일에 비슷한 사건을 반복하던 영화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반복을 깬다. 버스가 갑자기 멈춰 고장 나고, 바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시를 써놓은 노트를 불독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이 깨질 때 꼭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패터슨은 우연히 10살 꼬마 소녀를 만나는데 역시 시를 쓰는 그녀는 패터슨에게 영감을 준다. 또 벤치에서 만난 한 일본인 남자는 빈 노트를 선물로 준다. 반복이 살짝 깨지면서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오는 순간, 패터슨의 시가 완성된다.

패터슨은 반복되는 패턴 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작은 일탈을 경험한 뒤 돌아오는 월요일에 그의 일상은 조금 달라져 있다. 그 변화는 반복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월, 화, 수, 목요일의 반복이 없었다면 금, 토요일의 변화는 그에게 그토록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변화를 바라지만 사실 변화는 일상이 다져진 후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일상이 굳건하지 않으면 변화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없다. 그러니 변화하고 싶다면 일단 일상부터 확실히 만들어야 한다.


일상을 만드는 것은 습관이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밤에 몇 시에 잠드는지, 아침에 뭘 먹고 집에서 뭘 하는지 등 습관 하나하나가 쌓여 일상이 된다. 이런 습관들은 자신을 규정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같은 일을 반복하면 그 일에 익숙해진다. 의식하지 않는 행동에 있어서 인간은 위험 회피적이어서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굳이 바꾸지 않으려 하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습관 따위 신경 쓰기 귀찮아”라고 말하면 습관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오히려 습관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당신의 습관이 된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흘러간 시간 속에 습관이라는 일상이 나이테처럼 쌓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반복할수록 곧 그 일이 시시해진다. 시시해지면 했던 일을 또 하기 싫어진다. 심해지면 아예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그의 일상은 항상 누워 있는 것이 된다. 그가 일어나려면 일상의 흐름을 깨는 변화가 찾아와야 한다. 그 변화는 대단한 결심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지만,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요리를 하는 것처럼 바로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글을 쓰는 사람은 어느 순간 글쓰기가 일상이 될 것이고, 매일 같은 시간에 운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이 일상이 될 것이다. 작은 시작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일상을 만든다. 또 그 일상이 시시해지면 작은 변화를 찾아 새로운 일상을 만든다. 이렇게 변주하며 쌓아가는 일상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영화에서 패터슨이 찬미하는 윌리엄스는 일상을 찬미한 미국 시인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라(Say it, no ideas but in things)”가 그의 모토다. 그는 에즈라 파운드나 T. S. 엘리엇처럼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모를, 사상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배격했다. 사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고 그 감각으로 시를 썼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일상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 했다. 구어체를 사용해 일상 속에서 솔직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다.

“냉장고에 넣어 둔 자두를 먹었소.
아마도 당신이 조반으로 남겼던 것.
용서허우 아주 달고 맛좋고 시원했소.”

이처럼 가벼운 일상의 문장이 윌리엄스의 시다.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위트도 있다. 이 시의 제목은 ‘단지 이 말을 하려고’이다. 어쩌면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요즘 SNS에 올리면 ‘좋아요’를 많이 받았을 텐데 말이다.
윌리엄스는 시인이면서 소아과 의사였다. 그는 패터슨처럼 틈틈이 시를 썼다. 일하다가 문득 시상이 떠오르면 처방전 용지에 시를 썼고, 퇴근 후엔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썼다. 그에게 시는 자세 잡지 않고 찍는 가벼운 스냅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썼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이고, 사물이 중심이 되는 시를 썼다.

“아주 많은 것들이
붉은
손수레에 달려 있다.
빗물에
광이 난다.
그 옆에 하얀
병아리들.”

이 시의 제목은 ‘붉은 손수레에’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저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붉은색과 하얀색의 잔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윌리엄스는 “상상력이란 지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견고하고 독립적인 사물의 표면을 주의 깊게 인식”할 때 상상력은 힘을 얻는다고 했다.


윌리엄스를 흠모하는 패터슨 역시 윌리엄스처럼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세상의 표면을 오랫동안 관찰해 이 세상과 또 다른,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는 과장하지 않는다. 거창한 은유나 깨달음의 순간은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시를 조금씩 완성해갈 뿐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패터슨의 시를 한 편 살펴보자.

“집에 수많은 성냥이 있다.
항상 손에 닿는 곳에 있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오하이오 블루 팁
한때 다이아몬드 브랜드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견고한 작은 상자에
포장이 훌륭하고
어둡고 밝은 파란색과 하얀색 라벨
메가폰 모양으로
인쇄된 글자들은
세상을 향해 크게 외치는 듯하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다. (이하 생략)”

어쩌면 너무 지엽적이라 큰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시일수도 있지만, 성냥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불빛을 선사하듯, 어떤 시는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불꽃이 된다. 똑같이 ‘시’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패터슨>은 이창동 감독의 <시>와 정반대에 있는 영화다. 가슴 찢어질 듯한 슬픈 사연이 없어도, 거창한 사건이 없어도, 단지 작은 성냥갑 하나만으로도 시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패터슨에서 패터슨에 관한 시를 쓴 시인을 흠모해 그 시인처럼 패터슨에 관한 시를 쓰는 패터슨 씨처럼 일상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 매거진 bbb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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