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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코로나 사태로 작년보다 두달 이상 늦은 4월 25일 개최됩니다. 예년 같으면 1~2월은 오스카 레이스가 한창 절정에 달했을 시즌이지만 올해는 조금씩 늦춰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전체가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침체돼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카데미 유력한 후보들로 떠오르고 있는 영화들 몇 편을 미리 보게 됐습니다(아직 못본 작품도 많습니다). 영화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14편을 우선 간략하게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올해 화제작 중에는 넷플릭스, 아마존, 디즈니+, 애플TV 등 OTT에서 제작한 작품이 많습니다. 올해는 아마도 OTT 업체들이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수상하는 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부터 한 편씩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아카데미 후보작은 3월 15일 발표됩니다.

 

*이 글에는 영화 스토리 소개도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노마드랜드 Nomadland

클로이 자오

 

차기 마블 영화 ‘이터널스’의 감독으로 낙점된 중국계 여성감독 클로이 자오의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입니다. 미국에서 집 없이 차를 타고 떠돌면서 살아가는 유목민(nomad)들의 삶을 그린 영화로 슈퍼히어로와 전혀 거리가 먼, 매우 사실적이고 쓸쓸하고 시적인 작품입니다.

 

2011년 네바다주의 엠파이어는 대기업이 도산하자 곧 죽은 도시가 됩니다.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죽은 남편과 석고 공장에서 일해왔지만 실직자가 된 뒤 남은 재산을 팔아 밴을 한 대 장만해 길을 떠납니다. 차 안에서 먹고 자면서 펀은 일자리를 구하러 다닙니다.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그녀는 유목민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임에 합류합니다. 그곳의 유목민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펀은 혼자서 생존하는 기술을 익혀나갑니다. 유목민인 데이빗(데이빗 스트레이던)이 다가오지만 펀은 혼자서 길을 떠나는 삶을 택합니다.

 

 

펀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기를 스스로 선택한 여성입니다. 고독과 쓸쓸함과 빈부격차를 황량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세상의 끝에도 사랑과 우정은 꿈틀거려 희망을 품게 합니다. 생존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감정의 혼란을 겪지 않을 것 같은 단순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미련스러운 감정들을 포착해내는 순간들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펀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낭독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습니다. 개인적인 평점은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The Trial of the Chicago 7 (넷플릭스)

아론 소킨

 

치밀하게 잘 쓰여진 각본의 법정 드라마입니다.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을 쓴 아론 소킨이 직접 감독을 맡았습니다. 영화는 1960년대 닉슨 정권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한 7명에 대한 재판 실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피고가 이미 유죄라고 믿고 있는 듯한 호프만 재판관의 편협한 정치재판과 이에 항의하는 7명의 치밀한 두뇌 싸움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샤샤 바론코헨과 에디 레드메인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 변호인 마크 라일런스의 침착한 심문 장면, 조셉 고든레빗의 합리적인 검사 연기가 돋보입니다. ★★★☆

 

 

맹크 Mank (넷플릭스)

데이빗 핀처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시민 케인’의 각본가 허먼 맨키위츠의 삶을 그린 흑백 영화입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1930년대를 그린 이 영화를 아예 흑백 영상에 시나리오를 화면에 옮겨놓은 듯한 구성으로 만들어 영화계 대선배인 맨키위츠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이자 신랄한 독설가였던 맨키위츠는 오손 웰즈의 의뢰를 받고 당대 언론계 거물 랜돌프 허스트를 비판하는 시나리오를 씁니다. 화면 곳곳에 당시 할리우드를 꼼꼼하게 고증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허스트의 성에서 열린 파티에서 술에 취해 돈키호테 각색 스토리를 늘어놓으며 파티를 망쳐버리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압박 속에 써내려간 ‘시민 케인’은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됐고 맨키위츠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오손 웰즈와 공동 수상했습니다. 집중하면서 보면 곳곳에 숨겨진 1930년대 할리우드 디테일에 빠져들어가게 되는 작품입니다.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Ma Rainey’s Black Bottom (넷플릭스)

조지 C 울프

 

1927년 시카고를 배경으로 1세대 블루스 가수 마 레이니의 음반 녹음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녹음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진행되는 매우 연극적인 영화입니다. 오거스트 윌슨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는데 덴젤 워싱턴 제작을 맡았고 감독인 조지 C 울프는 영화보다 무대 연출 경력이 더 많습니다.

 

마 레이니 역할의 바이올라 데이비스와 작곡가를 꿈꾸는 트럼펫 연주자 채드윅 보스먼의 불꽃 튀는 연기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꼬장꼬장한 당대 최고 가수 마 레이니는 시종일관 백인 음반 제작자들에게 거만하게 굴고, 심지어 콜라 안 사오면 녹음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그녀의 이런 까칠함 뒤에는 차별받으며 살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연대감이 있습니다.

 

영화의 엔딩은 마치 사뮤엘 베케트의 희곡처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스먼이 연기한 레비는 마 레이니에게 자존심을 세우다가 해고당하는데, 백인 제작자 스터디벤트가 자신이 작곡한 곡을 녹음하지 않겠다고하자 정신적 방황 상태에서 자신의 구두를 밟았다는 이유로 피아니스트 톨리도를 칼로 찌릅니다.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매우 강렬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

 

 

사운드 오브 메탈 Sound of Metal (아마존 스튜디오)

다리우스 마더

 

제목처럼 사운드가 아주 중요한 영화입니다. 뮤지션이 청각 장애인이 된 뒤 새로운 삶의 사운드를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영화입니다.

 

여자친구 루(올리비아 쿡)와 2인조 메탈 밴드로 활동하는 드러머 루빈(리즈 아흐메드)은 과거 마약 중독의 영향으로 갑자기 청력을 잃습니다. 절망에 빠진 루빈에게 다가온 청각 장애인들의 멘토 조(폴 라치)는 청각 장애가 아닌 마약 중독이 그의 삶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루가 난폭해진 루빈을 떠나자 루빈은 조가 운영하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수화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루빈이 청각 장애인들과의 새로운 인생에 적응할 무렵 조는 루빈에게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남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루빈은 청각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차와 악기를 팔아 달팽이관 임플란트 수술을 받습니다. 이에 실망한 조는 자신이 세운 커뮤니티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집이기에 루빈에게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루빈은 루에게 돌아가지만 세상으로 돌아온 루빈에게 들리는 소리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임플란트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잡음이 심해 또렷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루빈은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임플란트를 빼고 적막이라는 새로운 삶의 사운드를 발견합니다.

 

영화는 ‘소리 없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Stillness’가 천국이라고 가르치는 조의 말은 관객에게도 멘토링이 되어줍니다. 조를 연기한 폴 라치는 청각 장애 부모 아래서 자라 실제로도 수화에 능숙하다고 합니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의 각본을 쓴 다리우스 마더의 감독 데뷔작으로 섬세한 사운드 연출이 돋보입니다. 청각 장애인들끼리 식탁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수화로 대화하며 웃으며 밥 먹는 장면, 피아노 위에 손을 얹고 음악을 촉각으로 감상하는 장면, 루빈이 보이스톡으로 전화 통화하는 장면 등 청각 장애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온 더 록스 On the Rocks (애플TV)

소피아 코폴라

 

'블링 링' '매혹당한 사람들' 등 매년 화제작을 내놓고 있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가벼운 소품용 부부 드라마입니다. 미국판 ‘부부의 세계’와 비슷한 줄거리인데 결말은 전혀 다릅니다.

 

뉴욕에서 스타트업 CEO인 남편 딘(말론 웨이얀스)과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로라(라시다 존스)는 3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남편 회사의 파티에 갔다가 매력적인 직원 피오나(제시카 헨윅)를 보고 남편이 혹시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의심합니다. 로라는 미술품 딜러에서 은퇴한 뒤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 펠릭스(빌 머레이)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모험심 강한 펠릭스는 딸을 설득해 딘의 뒤를 쫓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딘의 출장지인 멕시코 해변까지 따라가서 딘이 바람피는 현장을 잡겠다고 벼르지만 스토리는 이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70세의 빌 머레이는 모든 여자에게 집적대는 노년의 섹시한 남자로 등장하는데 딸이 아무리 말려도 여자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꽤 귀엽습니다. 제목인 ‘온 더 록스’는 부부관계가 파탄 위기에 놓여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중년 여성들이 많이 공감할 영화일 듯합니다. ★★★

 

 

소울 Soul (디즈니+)

피트 닥터

 

‘인사이드 아웃’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인간 내면에 관한 픽사 애니메이션입니다. 최초의 흑인 주인공은 신선하고, 실사와 구분되지 않는 정교한 그림체는 놀랍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캐릭터들은 사랑스럽습니다.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는 재즈 뮤지션을 꿈꾸지만 현실적인 선택으로 음악교사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꿈꿔오던 도로시아(안젤라 바셋) 공연 오디션에 합격해 기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데 그만 하수구 홀에 빠져 죽고맙니다.

 

‘위대한 이전’ 세계에 도착한 조는 그곳이 지구에서 새롭게 태어날 영혼들이 머무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행정착오에 의해 영혼 22와 짝이 맺어지는데 영혼 22는 과거 간디, 마더 테레사, 코페르니쿠스도 멘토링을 포기할 정도로 지구에 가기 싫어하는 시니컬한 영혼입니다. 조는 위대한 이전 세계를 떠도는 해적 문윈드의 도움으로 지구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착오로 영혼이 뒤바뀌어 그는 고양이가 되고 영혼 22가 자신의 몸을 차지합니다. 영혼 22는 가드너의 몸으로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피자의 맛, 낙엽, 환풍구 바람, 걷기, 트럼본 소리를 통해 수천년만에 처음으로 인생이 살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위대한 이전 세계의 회계사 테리(레이첼 하우스)는 1명이 실수로 들어왔다는 것을 발견하고 직접 지구로 잠입해 가드너와 영혼 22를 붙잡아옵니다. 영혼 22의 지구 통행증을 들고 다시 지구로 가게 된 조는 멋지게 수트를 차려입고 도로시아의 공연에서 훌륭한 피아노 연주를 해내지만 그것이 또다른 반복될 일상의 시작일 뿐임을 알게 되고, 삶의 의미는 재능을 연마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그가 무시해온 작은 일상을 소중하게 느끼는 과정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빠른 진행과 복잡한 설정으로 단번에 스토리를 따라잡기 쉽지 않을 정도로 아동용이 아닌 철저히 성인만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입니다. 꿈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라는 ‘위플래시’ ‘라라랜드’와 정반대에 있는 영화입니다. 꿈에만 몰두하는 인생은 오히려 불행하고, 인생의 정수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 있다는 훌륭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곳곳에 등장하는 한글도 반갑습니다. ★★★★

 

 

미나리 Minari

정이삭

 

윤여정이 미국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만 20여개의 트로피를 가져가 화제가 된 작품입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떠나 남부 아칸소 시골마을로 이사온 가난한 한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남편(스티븐 연)은 병아리 감별사 일에 지쳐 농장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아내(한예리)는 캘리포니아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는 심장이 아픈 손자와 교감을 나눕니다. “당신은 가족 대신 농장을 선택했어” 한예리의 이 말에 입술을 굳게 다문 스티븐 연의 표정이 인상적입니다.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불타는 농장과 윤여정의 멍하게 걷는 모습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는 한예리가 직접 불렀습니다. ★★★☆

 

 

뉴스 오브 더 월드 News of the World

폴 그린그래스

 

제목에서 ‘뉴스 오브 더 월드’라는 지금은 폐간된 영국의 유명한 타블로이드 신문이 떠오르지만 그 신문과 이 영화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영화는 남북전쟁 이후 1870년대 텍사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뉴스를 읽어주는 남자 캡틴 키드(톰 행크스)의 이야기입니다. 폴레트 자일스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캡틴 키드는 마을 회관에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다른 지역의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어주며 푼돈을 벌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덕분에 북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됩니다. 키드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도 지녔습니다. 만담꾼의 스토리 소재가 신문이 된 첫 시대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가 캡틴으로 불리는 이유는 남북전쟁 시기 남부 동맹군에 참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 패배 후 북쪽에 적대적인 주민들에게 북쪽 신문을 읽어주며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통합론자의 역할도 수행합니다.

 

키드는 북군 지배구역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부모를 잃고 버려진 인디안 소녀 조한나(헬레나 젱겔)를 발견합니다. 그는 아이를 보호시설에 맡기려 하지만 누구도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키드는 아이를 먼 친적에게 맡기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카이오와어를 쓰는 조한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키드와 서먹해 하다가 조금씩 마음을 엽니다. 아이를 납치하려는 갱들에게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믿음직스러운 배우 톰 행크스가 연기하기에 캡틴 키드는 등장과 동시에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영웅스런 카우보이들의 총격전이 난무하는 서부극이 아닌 비교적 일반인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기존 서부극과 차별화됩니다. 당시에도 신문 기사는 누군가 죽고 살해당하는 등 부정적인 뉴스 천지였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귀하고 드물던 시대, 멀리 있는 생면부지 사람들의 소식을 단지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뉴스는 갈등 치유와 화해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낯설어하다가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며 점점 부녀지간처럼 되어가는 캡틴과 조한나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

 

 

프라미싱 영 우먼 Promising Young Woman

에머럴드 퍼넬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배우이자 감독, 각본가, 제작자 등 다재대능한 에머럴드 퍼넬의 장편영화 데뷔작입니다. 그녀는 '안나 카레니나' '대니시 걸' '더 크라운' 등에 출연했고, 절친 피비 월러브리지의 뒤를 이어 '킬링 이브' 스크립트를 쓴 적도 있습니다. 올해 퍼넬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함께 런던에서 뮤지컬 ‘신데렐라’를 공동 연출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퍼넬이 직접 쓴 오리지널 스크립트로 그녀가 연출, 제작까지 맡았습니다. 퍼넬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블로우잡 비디오에 잠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작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돼 호평받았고 로튼토마토에선 91%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강렬합니다. 페미니즘 시대의 핵펀치 같은 영화입니다. 그동안 예쁜 배우라고만 생각해왔던 캐리 멀리건은 ‘서프러제트’에서 페미니즘에 눈을 뜨더니 이번엔 도발하는 남성들을 응징하는 복수의 화신으로 과감하게 변신했습니다. 캐리 멀리건은 이 영화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29세의 카산드라(캐리 멀리건)는 주말마다 클럽에 갑니다. 술 취해 인사불성인 척하면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는데 결국 그녀를 꼬셔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남자들은 다 똑같습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 척 하다가 결국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깁니다. 카산드라는 남자가 혼자 흥분해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술 취한 연기를 그만두고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여자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연기였음을 알게 된 남자는 기겁을 하며 도망갑니다. 카산드라가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은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남자들에게 지금 그가 자신을 강간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카산드라가 이렇게 살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원래 의대생이었습니다. 제목처럼 촉망받던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한 사건으로 인해 의대를 중퇴하고 그 뒤로는 삶의 목적을 잃었습니다. 그녀에겐 소꿉시절부터 단짝 친구 니나가 있었는데 의대까지 함께 간 니나는 7년 전 그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끊었고 카산드라는 여전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목숨을 끊었지만 학교와 가해 학생들은 반성은커녕 니나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현실을 카산드라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카산드라는 그 사건의 가해자들을 하나씩 찾아가 자신과 니나가 당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잘나가는 의사 혹은 사모님이 된 동창들을 하나씩 찾아가 그들에게 니나의 죽음을 일깨워주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응징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지금까지 전개와 결이 다른 반전이 숨겨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결말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날이 바짝 선 면도날 같은 작품으로 영화를 보고 나면 두 뺨이 얼얼해집니다. ★★★☆

 

 

원 나이트 인 마이애미 One Night in Miami (아마존 스튜디오)

레지나 킹

 

1964년 말콤 X, 무하마드 알리, NFL 스타이자 할리우드 배우 짐 브라운, 소울 뮤지션 샘 쿡이 캐시어스 클레이의 챔피언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마이애미의 한 모텔에 모입니다. 말콤은 샘 쿡이 백인들이 듣기 편한 음악을 만드느라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며 왜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처럼 만들지 못하느냐고 질책합니다. 캐시어스는 말콤의 전도로 무슬림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말콤이 이슬람 단체를 떠나기로 했다고 하자 화를 냅니다. 브라운은 배우로 전향했는데 그 배경에는 NFL 내의 흑인 차별이 있었습니다. 축하 파티로 시작한 모임은 흑인 인권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심각한 토론의 장이 됩니다.

 

켐프 파워스의 원작 희곡은 당대 위대한 인물 넷이 만약 같은 장소에서 만났더라면 하는 상상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레지나 킹은 이를 매우 정교하게 영화로 옮겼습니다. 네 명의 캐릭터들의 매력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후반부에 샘 쿡이 ‘A Change is gonna come’을 부르는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킹슬리 벤아디르, 샘 고레, 레슬리 오덤 주니어, 알디스 호지 등 네 배우들의 연기도 참 좋습니다. 최근 흑인 인권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도 가장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다 5 블러드 Da 5 Bloods (넷플릭스)

스파이크 리

 

스파이크 리는 언제나 흑인이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만듭니다. ‘블랙클랜스맨’이 우화 같은 영화였다면 ‘다 5 블러드’는 피를 나눈 다섯 전우를 뜻하는 제목처럼 직설 화법입니다. 베트남전에서 흑인들도 미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는데 왜 정작 미국사회에서 차별받아야 하느냐는 것이 영화의 주장입니다. 영화는 베트남전에 관한 다양한 뉴스클립으로 시작해 마틴 루터 킹의 흑인 인권 연설과 ‘Black Lives Matter’ 외침으로 끝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4명의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은 백발이 되어 호치민에서 만납니다. 이들이 베트남에 다시 온 이유는 당시 숲속에 묻어둔 골드바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4명은 당시 베트남에서 전사한 노먼(채드윅 보스먼)과 함께 ‘5 블러드’로 불린 전우입니다.

 

4명의 용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금을 찾습니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 벌어집니다. 아직 매설돼 있는 지뢰밭, 베트남 갱단과의 사투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베트남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쓰고 다니는 다혈질의 폴(델로이 린도)은 다른 전우들과 의견 차이로 혼자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금을 나누기로 하고 베트남 탈출을 감행하려 합니다. 하지만 금 매입업자인 프랑스인 드로쉬(장 르노)가 갱단 두목임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새 국면을 맞습니다.

 

채드윅 보스먼이 연기한 노먼은 젊은 시절 네 명의 흑인들에게 영감을 준 리더십 있는 청년으로 회상 장면에 등장합니다.

 

스파이크 리 영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긴 했지만 이번엔 특히 더 단순하고 강렬합니다. 폴이라는 고집불통 캐릭터가 영화 내내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역시 스파이크 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정입니다. 폴을 연기한 델로이 린도의 연기는 참 놀랍습니다. ★★★

 

 

그녀의 조각들 Pieces of a Woman (넷플릭스)

코르넬 문드럭초

 

가정분만을 선택한 여성이 유산 이후 무너져버리는 감정을 현미경처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드라마입니다.

 

출산을 앞두고 가정분만을 선택한 부부가 있습니다. 아내 마사(바네사 커비)가 조기 출산 기미를 보이자 원래 예정됐던 조산사가 오지 못하고 다른 조산사인 에바(몰리 파커)가 대신 찾아와 아이를 받습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지만 갑자기 아이의 심장박동이 약해지더니 곧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남편 숀(샤이아 라보프)이 구급차를 부르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초반 30분 동안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의도적인 클로즈업 사용으로 인해 출산에서 유산까지 이어지는 시퀀스가 끝나고 나면 관객 역시 산모처럼 기진맥진한 상태가 됩니다. 아직 출산 경험이 없는 바네사 커비는 놀라운 연기로 출산의 고통과 유산의 상실감을 표현합니다.

 

딸의 죽음 이후 화목했던 부부 관계는 깨지고 조산사와 법정 공방이 시작됩니다. 미디어는 에바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죽이기 위해 조산사를 자처해 그 집에 찾아간 것으로 보도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마사가 알고 있습니다. 상실감을 견디고 극복하는 힘은 결국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용서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영화는 주장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바네사 커비에 대해 계속 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 그녀의 표정, 그녀의 손동작 등 그녀의 조각들이 한동안 뇌리에 깊게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더 크라운’의 마가렛 공주, ‘미션 임파서블’의 화이트 위도우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런던 연극계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다진 배우입니다. 이안 찰슨 어워드도 수차례 수상했고 BAFTA도 받았습니다. ‘그녀의 조각들’로는 온갖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있고 아카데미도 유력 후보입니다. 캐리 멀리건과 함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고 양강 구도가 형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사의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그녀는 딸에게 다 잊고 강해져야 한다면서 자신이 태어났을 때 얼마나 약한 아이였는지, 어떤 의지로 살아남았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앨리스는 여기 살지 않는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엘렌 버스틴이 연기합니다. 마침 이 영화의 기획자가 마틴 스콜세지입니다.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차분하면서도 강렬한 연출력이 탁월하게 빛나는 작품입니다. ★★★★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

론 하워드

 

베스트셀러 원작에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아메리칸 드림 소재에 연기 잘 하는 유명 배우들의 가세로 개봉 전부터 기대를 모아온 작품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에 못미쳐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화가 소설처럼 러스트벨트의 빈곤 지역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주기를 바랐지만, 론 하워드 감독은 개천에서 용난 단순한 스토리로 만들었습니다.

 

힐빌리는 러스트벨트의 빈곤 지역을 얕잡아부르는 속어입니다. 오하이오의 가난한 동네에서 예일법대생이 된 밴스(가브리엘 바소)는 위험에 빠진 약물중독 엄마(에이미 아담스)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의 집안은 중독자들로 가득해 그 역시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갈 운명처럼 보였지만, 그가 약에 빠지지 않고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글렌 클로스)가 그를 강인하게 키운 덕분이었음이 영화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옛날 가족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영화입니다. 캐릭터들은 입체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다만 뻔한 구도라도 이런 선악이 분명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만족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정말 많이 늙은 글렌 클로스는 표정 하나하나에서 인생이 느껴집니다. ★★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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