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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이전에 이안 감독이 있었다. 이안 감독은 아시아인 최초의 오스카 감독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 그리고 2013년 '라이프 오브 파이'로 두 차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는 '라이프 오브 파이'로 감독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올라 고마운 사람들 이름을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영화의 신에게 감사드립니다."


2013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


영화의 신? 이안 감독은 불교 신자다.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평생 기억에 남을 오스카 시상식에서 왜 영화의 신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을까? 힌트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 파이가 자신을 찾아온 소설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뒤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 장면 말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만들어진지 7년이나 지난 영화이니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면서 영화의 뒷부분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캐나다에 사는 파이 파텔이라는 인도계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온 소설가에게 구명보트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두 가지 버전으로 들려준다. 첫 번째 버전은 파이가 호랑이,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함께 항해하다가 호랑이와 동고동락한 이야기, 두 번째 버전은 파이가 엄마, 잔인한 주방장, 불교 신자와 함께 구명보트를 탔다가 홀로 살아남은 이야기다.



소설가는 첫 번째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망망대해에 표류해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은 남자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게 있었지만 호랑이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야기는 이제껏 없었다. 의외의 상황이 있고 반전이 있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 흥미를 느낀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과연 진실일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정답은 없다. 파이가 진실을 말했는지 거짓말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관객은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어야 한다. 이때 화자에 대한 신뢰가 그가 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된다. 소설가는 파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미 그를 신뢰하고 있다. 영화는 이것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심취하는 것은 그것이 멋진 이야기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안 감독이 영화의 신에게 감사를 드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만드는 과정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영화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 앞에선 특수효과 아티스트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동물보호단체로부터 영화 속 동물이 학대당했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평지풍파를 겪은 끝에 만든 영화로 오스카 감독상이라는 큰 상을 받은 이안 감독은 영화 속 파이처럼 감회에 젖어 영화의 신이 실재한다고 믿게 되지 않았을까.


2013년 오스카 시상식을 앞두고 VFX 아티스트들이 정부의 외국 스튜디오 보조금 정책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다.


논란이 된 사안들이 궁금한 독자를 위해 덧붙이자면, 당시 시상식장 앞에서 500명의 VFX 아티스트들이 시위를 벌인 이유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리듬&휴(R&H) 스튜디오가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 파산했기 때문이다. 컴퓨터그래픽 제작 비용이 낮아지면서 경쟁사들이 늘어났는데 미국 정부는 외국 스튜디오에 보조금과 세금면제 혜택을 주고 있었다. 미국 아티스트들은 이것이 불공정 경쟁을 야기해 회사 파산에 이르렀다며 항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날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았고 R&H의 책임자가 올라 수상소감을 말할 때 마이크가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안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일자리를 잃으면서 고군분투한 아티스트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빼먹어 나중에 비판받기도 했다.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이 참여하는 영화제작 과정에서 감독이라는 자리는 이처럼 바람잘 날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배를 끌고 가야 하는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다. 영화의 신을 몇 번이라도 찾지 않고는 항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연배우 수라지 샤르마, 감독 이안, 원작자 얀 마텔.


얀 마텔이 2001년에 펴낸 동명의 소설은 곧바로 영화 판권이 팔렸고 제작사인 폭스2000은 2003년부터 영화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감독 선임이 번번이 무산되며 미뤄지다가 2009년 마침내 이안 감독이 맡기로 하면서 영화 제작은 탄력을 받았다. 이 시기는 마침 '아바타'로 인해 3D 영화가 '미래의 영화'로 인식되던 시기다. 이안 감독은 영화를 3D로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3D 효과를 극대화할 결정적 무기로 '물'을 선택한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의 투명함과 반사효과가 3D로 보여지면 관객에게 새로운 극장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다시 봤는데 물론 여전히 좋은 영화지만 2013년 아이맥스 3D로 처음 봤을 때의 감흥에는 미치지 못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잔잔하게 바닷물이 일렁일 때, 물속 생명체들이 푸른빛을 내뿜을 때 3D 효과는 감탄을 자아냈다.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물속에 빨려들어가 마치 내가 파이가 되어 망망대해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로도 필자는 이 영화를 능가하는 3D 영화를 별로 본 적이 없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휴고' 정도가 3D의 아름다움을 겨룰 만하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감독이 이토록 물을 공들여 묘사한 이유는 영화의 주제인 '믿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물은 생명이자 주인공 파이의 감정이 투영된 매질이다. 물은 형체가 없는데 인간이 믿는 절대자 역시 형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물에게 달려 있기에 영화에서 물은 절대자다. 파이가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를 아무리 무서워해도 그 역시 물 앞에선 한낱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크루즈선을 덮친 물은 파이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가족도, 동물원도, 인도도, 사랑하는 여인 아난디도 모두 잃고 파이는 망망대해를 떠돈다. 하지만 물은 파이를 괴롭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은 파이의 생명을 가져갈 것처럼 난폭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다. 파이가 리처드 파커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 사이, 정작 파이는 물에 길들여진다. 물은 비상식량을 빠뜨려 그를 굶주리게 하고, 채식주의자인 그가 기어이 생선을 먹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든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모터가 달리지 않은 구명보트를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 이끌어 기이한 섬에 닿게 하는 것도 물이다. 파이는 그 섬의 호수에서 잠시 힐링을 취하다가 밤이 되어 물이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는 광경을 지켜본 뒤 섬을 떠난다. 그가 가는 곳 어디서도 물은 모든 생명을 좌우할 만큼 절대적이다.


물은 형체가 없다. 하지만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파도가 잦아들어 평온해 보이는 밤, 깊은 곳에서부터 헤엄쳐 온 고래가 빛가루를 뿌리며 달을 향해 용솟음칠 때다. 달빛에 반사된 물이 영험한 푸른빛을 내뿜을 때 파이는 절대자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듯한 황홀경에 빠진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다음 장면에서 파이는 아껴둔 식량을 잃고 말지만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물에 자기 자신을 맡기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파이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인도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에 심취하며 신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는데 마침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파이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절대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물이 곧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향해 "전 이미 굴복했잖아요. 뭘 더 원하세요?"라며 울부짖는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바다에 고립된 파이는 절대자인 물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지만 그에겐 공포의 대상이 하나 더 있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다. 성경 창세기 속 노아의 방주에선 동물들이 화목하게 생존한 모양이지만 파이의 방주는 다르다. 이곳은 약육강식의 룰이 그대로 적용되는 미니 정글이다. 하이에나는 얼룩말을 물어뜯고 늙은 오랑우탄을 괴롭히다가 결국 호랑이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한다. 파이의 방주에서 일인자가 됐지만 리처드 파커는 심드렁하다. 구명보트에 갇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호시탐탐 파이를 노린다. 그때마다 파이는 보트 옆에 더 작은 튜브를 띄워놓고 몸을 피한다.


"우리 둘 다 험한 세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같은 주인 아래서 편하게 살았다. 이제 진짜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녀석이 있어서 난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었다.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그의 말마따나 리처드 파커는 파이가 잠들지 않도록 만드는 무서운 파트너다. 수험생 옆에서 시험을 함께 보는 경쟁자, 리더 옆에서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참모, 정부를 견제하는 야당, 기업에겐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다른 브랜드 같은 존재다. 마라토너는 페이스 러너 없이는 좋은 기록을 낼 수 없다. 막강한 경쟁자가 있을 때 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생존 역시 마찬가지여서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서바이벌 경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진작 밤하늘을 바라보며 밤새 울먹이다가 생을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우리는 예상치 못한 시련을 겪을 때 비로소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 절망이 깊을수록 사고의 폭도 넓어져 기존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때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파이는 대학에서 유대교를 가르치는 교수로 살고 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섭렵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종교를 믿는다면 사실상 종교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지만 그는 똑같은 질문을 하는 소설가에게 의심이 많을수록 믿음도 깊어진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잃은 최악의 상황에서 극강의 자유로움을 경험해본 파이는 믿음이란 곧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종교를 절대시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순기능이 믿는 자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종교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지 종교 그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절대자는 어디에나 있다. 물을 절대자로 만드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다.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싶게 만든다. 세상은 믿는 대로 보이는 법이고 그 믿음은 선택의 문제다. 영화의 신도 마찬가지다. 믿는 자에게 신은 영화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교훈은 이것이다. 멋지고 근사하고 황홀해 보이는 이야기를 믿고 싶다면 먼저 의심하라. 의심하면서 믿어라. 그리하면 믿는 자에게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 [BBB] 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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