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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영화들이 스크린을 점령할 동안 작은 영화들은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상영시간과 사투를 벌인다. 어떤 영화들은 개봉한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2019년을 돌아보며 흥행에선 주목받지 못했지만 묻히기 아까운, 작지만 강한 영화 5편을 골라봤다.



진보와 보수의 진솔한 대화 - 두 교황

(관객 1만6427명)


카톨릭 역사상 이런 경우는 없었다. 지난 2013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생전 퇴임해 새로운 교황에게 직위를 물려준 것은 600년만의 대사건이었다. 독일 출신 베네딕토 16세와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영화는 너무나도 성향이 다른 두 인물에 주목해 교황 교체 과정을 재현한다. 드라마에 간간히 섞은 실제 화면은 이야기에 관객이 몰입하도록 돕는다. 브라질의 슬럼가를 리얼하게 묘사해 극찬받은 '시티 오브 갓'(2002), 주제 사라마구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자들의 도시'(2008)를 만든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이번에도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다.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인 베네딕토 16세에 비해 프란치스코는 개방적인 성향으로 인기 많은 추기경이었다. 영화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 추기경이 로마 교황청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시작한다. 교황청의 성추문 스캔들로 위기에 몰린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골리오를 바티칸으로 초청하고 두 사람은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교리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와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자는 진보주의자는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빚지만 결국 카톨릭 전체를 위해 각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를 이루고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친구가 된다. 특히 두 사람이 함께 탱고를 추는 마지막 장면이 뭉클하게 남는다. 진보와 보수로 극명하게 갈린 한국 사회에 참고가 될만한 영화다.


물러날 때를 아는 원칙주의자 베네딕토 16세로 분한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정말 놀랍다.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 감정이 묻어난다. 프란치스코를 연기한 조나단 프라이스도 싱크로율이 딱 맞는 캐스팅이다.



고달픈 노동현장 보고서 - 미안해요, 리키

(관객 2만5649명)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는데 왜 내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영화다.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은 언제나 노동자의 편에서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는 영화를 만들어왔고 83세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예의 날카로운 시선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이번엔 잉글랜드 북동쪽에 위치한 공업도시 선더랜드에서 택배기사로 일하는 리키(크리스 히친)와 간호조무사 애비(데비 허니우드) 부부의 이야기다. 영화는 리키가 큰돈을 들여 밴을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리키는 고용 형태가 바뀌어 개인사업자로 택배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엄밀하게 회사 대 회사의 계약이지만 명백한 갑을 관계로 인해 이제 관객은 비정규직보다 더한 노동 착취를 목도하게 된다. 리키에겐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쉴 경우엔 대리기사를 고용하는 비용을 토해내야 한다.



사춘기가 된 아들이 학교에서 범죄자로 몰릴 위기에 처하자 리키는 배달을 멈추고 학교로 달려갔는데 이게 화근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리키는 폭력강도를 당해 배달할 물품을 도둑맞고 회사는 그에게 물품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크게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악화되기만 하는 리키 가정의 상황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더 싸게 더 빨리를 모토로 효율적인 성과만 추구하는 시스템이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고통스러울만큼 자세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뒤늦게 조금씩 입소문을 얻고 있지만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10만명 가까운 관객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흥행 성적은 조금 아쉽다.



정치풍자 블랙코미디 - 스탈린이 죽었다!

(관객 5546명)


정치풍자 미드 '부통령이 필요해'의 아르만도 이아누치 감독이 만든 소련판 '그때 그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우왕좌왕하는 권력자들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그린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을 재미있게 봤다면 '스탈린이 죽었다!'의 유머코드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오케스트라 공연 담당자가 스탈린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연 녹음본을 가져오라는 스탈린의 말에 공연 담당자는 사색이 돼서 방금 막 끝난 공연장에 연주자들과 관객을 다시 불러모아 억지로 녹음을 위한 재공연을 펼친다. 스탈린의 말 한 마디가 곧 법이고 목숨이던 시대를 풍자하는 에피소드다.



제멋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공포정치를 일삼던 독재자 스탈린은 그러나 공연 LP를 듣다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다. 스탈린에 아부하는 것이 일상이던 권력자들은 스탈린 이후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놓고 온갖 눈치 작전을 벌인다. 부서기장 게오르기 말렌코프(제프리 탬버)가 권한대행에 오르지만 비밀경찰 NKVD 총수 라브렌티 베리야(사이먼 러셀 빌)와 중앙위원회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스티브 부세미)는 우유부단한 말렌코프를 호시탐탐 견제한다. 여기에 스탈린의 철부지 아들과 딸이 등장해 차기 권력을 놓고 긴장감은 고조된다.


1953년 소련 역사의 분기점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굵직한 이름들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가볍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모든 진지한 순간을 무력화시키며 무소불위 권력자들을 광대로 만들어버린 배우들의 호연이 반갑다.



강렬한 첫사랑 - 아사코

(관객 1만5535명)


바람 부는 육교 위에서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에게 첫눈에 반하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첫사랑 바쿠는 예고없이 그녀를 떠난다. 2년 후 첫사랑을 잊지 못하며 살던 아사코는 바쿠와 똑같이 생긴 남자 료헤이를 만난다. 제멋대로인 바쿠와 달리 자상한 료헤이의 고백을 아사코는 받아들인다. 또다시 5년의 시간이 흘러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청혼하지만 이때 사라졌던 바쿠가 나타나면서 아사코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첫사랑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사코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순수했기에 어리석었고,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결정을 내렸으면서도 그 결정이 충동적이었던 탓에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아사코는 지켜보는 입장에선 '민폐' 캐릭터지만 우리에겐 누구나 아사코 같은 면이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청춘영화로 한정하기에 영화의 만듦새는 훌륭하다.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세련된 영상미에 절제하는 연출력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더니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감정이 끌어오르는 순간 여백의 미를 활용해 관객으로 하여금 한 발 떨어져 사랑의 의미를 자문하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장면 도망가는 료헤이와 쫓아가는 아사코를 원경에서 롱 쇼트로 촬영한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를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다큐멘터리 '파도의 소리'(2011)와 프랑스 누벨바그 거장 자크 리베트를 떠올리게 하는 5시간짜리 영화 '해피 아워'(2015)로 호평받으며 주목받아온 감독이다. '아사코'는 2018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으로 봉준호 감독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희망없는 세상의 출구찾기 - 갤버스턴

(관객 6536명)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40살 남자 로이(벤 포스터)는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을 처리한 뒤 우연히 19살 소녀 로키(엘르 패닝)를 구하게 된다. 폭력적인 계부를 피해 3살난 아이와 함께 도망친 로키는 로이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로이는 로키가 더 좋은 보호자를 만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고립된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질 때 이들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온다.


킬러인 아저씨가 고통받는 소녀를 구해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레옹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무거운 편이다. 두 사람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러닝타임 내내 화면을 짓누른다. 하지만 고통스런 시간 속에 간간히 피어나는 웃음꽃, 힘든 자가 더 힘든 자를 돕는 희생 등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프랑스 배우이자 작가인 멜라니 로랑이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영화다. 대사 중간마다 여백의 미가 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로부터 탈출하려 발버둥치다가 끝내 울부짖는 로키 역할은 엘르 패닝이 맡았다. 아역 배우 출신으로 그동안 수십 편의 영화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온 21세의 패닝은 이 영화를 통해 쌓아온 연기 내공을 여실히 드러낸다.


'갤버스턴'은 텍사스 남동부에 위치한 섬으로, 영화 속에서 로이와 로키, 3살난 아이가 유일하게 가족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바다가 있는 곳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작은 희망을 상징하는 제목이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20/01/27477/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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