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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영화의 고정관념을 깼다.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기존 레이싱 영화들과 다르다. 화면을 왜곡시키는 화려한 레이싱 장면도 없고 승부에 목숨 거는 악당도 없고 홍일점으로 등장하던 섹시한 여자도 없다.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꼼꼼한 장인정신, 두 남자의 우정, 땀을 배신하지 않는 승부, 그리고 레이싱에 빗댄 인생이다. 덕분에 영화는 레이싱 팬뿐만 아니라 차에 큰 관심이 없는 관객도 만족시킨다. 빼어난 완성도와 몰입감으로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2%에 달하고,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부문 후보에 오를 것이 유력해 보인다.



소재는 1966년 프랑스 르망24 레이스에 출전한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이다. 1960년부터 6년 연속 대회를 석권한 페라리에 맞선 포드의 도전을 그린다. 미국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자동차 회사 브랜드가 제목으로 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 간 대결이나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영화는 또 아니다. 영화 주인공인 두 남자는 오직 자동차만 생각하는 자동차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시속 370km로 일반 도로를 24시간 질주하는 위험한 승부에 뛰어든 것은 도전 그 자체가 그들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캐롤 셸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은퇴한 카레이서로 레이싱카 디자이너인 셸비는 RPM 7000이 넘는 순간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1960년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RPM 7000은 엔진 한계다. 자칫하다가는 엔진이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숫자다. 레이서의 입장에선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출력을 높이면 빨라질 수 있겠지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선 이 숫자를 버텨야 한다. 승부를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 이기느냐 죽느냐의 경계가 RPM 7000에서 결정된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켄 마일스는 상대가 누구든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다혈질의 사내다.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지만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자동차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레이싱 대회에서 밥먹듯 우승한다.



사건의 발단은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가 경영하는 포드사가 유럽차와 경쟁에서 밀리면서 경영난에 봉착한 것이다. 대책 회의에서 마케팅 담당 부사장 리 아이어코카(존 번달)는 최고의 레이싱카를 만드는 페라리를 인수하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포드 브랜드에 ‘승리’의 이미지를 입히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페라리는 포드의 인수 제안을 거절한다.


페라리 인수에 실패하고 창업자 엔초 페라리에게 굴욕까지 당한 포드 2세는 페라리를 꺾을 레이싱카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아이어코카는 백지수표를 들고 셸비를 찾아온다. 포드의 제안을 승낙한 셸비는 마일스를 찾아가 레이서로 영입한다. 이렇게 포드의 레이싱카 개발과 경주를 위한 드림팀이 완성된다.



이쯤 되면 포드와 페라리의 경쟁 구도에서 불꽃 튀는 드라마가 만들어질 법하지만 영화는 뻔한 길을 가는 대신 포드 내부의 갈등에서 드라마를 찾는다. 부회장 레오 비비(조쉬 루카스)는 마일스가 포드의 상징적인 얼굴이 되기엔 지나치게 제멋대로라며 반대하고 이를 중재하려던 셸비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포드 내부의 관료주의에 맞서 자유로운 영혼인 셸비와 마일스가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드라마를 끌고가는 축이다. 자연스럽게 승부는 포드 대 페라리와의 대결보다는 포드 대 포드의 대결로 변해간다.


르망24에 참가한다는 것은 24시간 동안 서킷이 아닌 일반도로 1만3629km를 최고 속도로 질주하면서도 브레이크가 작동할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매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하는 경기다. 도중에 엔진이 멈추거나 충돌하는 등 온갖 사고가 발생해 레이스를 포기하는 차가 속출한다. 영화 속에서 셸비가 포드 회장을 태우고 레이싱 시연을 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분기점 역할을 한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기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승부보다는 우정과 인생의 드라마에 방점을 찍은 영화는 클라이막스에서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포드 회장은 포드 차량이 동시에 들어오도록 마일스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지시하고 셸비는 마일스에게 이를 전한다. 평소 같으면 제멋대로 했을 마일스는 그러나 백미러로 뒤따라 오는 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속도를 늦추기로 결심한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최고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마일스에게 승부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적절히 타협해오던 셸비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마일스는 이 장면에서 서로의 역할을 바꾼다. 셸비는 마일스에게 결정을 맡기면서 타협을 거부하는 반면, 마일스는 처음으로 세상과 타협한다. 이전까지 두 사람의 우정이 서로를 열정의 끈으로 묶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이었다면, 이 순간 이후 둘의 우정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으로 변한다.



영화는 야심만만하다. 단순한 레이싱 영화의 서킷을 달리지 않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기어이 재미와 감동 두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한다. 인생을 그린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면서 또 대중적인 영화 중 가장 심오하다. ‘로건’ ‘앙코르’ ‘처음 만나는 자유’ 등을 만든 제임스 맨골드는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인물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셸비는 마일스의 아들을 찾아가 옛 추억에 잠긴 뒤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새로 만든 차를 몰고 길을 떠난다. 우정은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고 레이싱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동차주의자들의 인생이다.


포드 V 페라리 ★★★★

레이싱 영화의 외피를 입은, 자동차가 인생인 두 남자의 브로맨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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