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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페인트를 칠한다고 들었네.”


영화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찰스 브랜트가 펴낸 원작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주인공 프랭크 시런의 직업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총을 쏠 때 피가 페인트처럼 튀기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러셀 버팔리노와 지미 호파


배경은 195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주.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프랭크(로버트 드니로)는 페인트공이었다. 운전도 했다. 트럭으로 고기를 날랐다. 일부는 마피아에게 배달했다. 그러다가 러셀(조 페시)의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러셀은 펜실베니아 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 조직의 살림꾼이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르는 게 없었고 모든 일은 러셀을 통해서만 처리됐다. 마피아 두목 안젤로(하비 케이틀)가 러셀의 절친이었다.



프랭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참전해 이탈리아에서 싸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러셀의 신뢰를 얻는다. 러셀의 오른팔이 된 프랭크는 운전부터 건물 폭파,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러셀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한다.


어느날 러셀은 조직의 높은 곳에 있는 남자가 위험에 처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며 프랭크에게 넌지시 묻는다. 러셀이 말한 남자는 1957년부터 10년간 화물운송노조 위원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지미 호파였다. 알 파치노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법정에 선 지미 호파


지미 호파는 한때 대통령만큼 유명했던 노동운동가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20대의 나이에 파업을 주도하며 노동자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조직을 키우는 과정에서 마피아와 결탁해 각종 범죄를 저질러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1975년 디트로이트의 한 레스토랑에서 마피아를 만나기 직전 실종됐는데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프랭크는 시카고로 날아가 지미를 만나고, 트럭 노동자를 위협하는 택시들을 폭파시키는 등 골칫거리를 처리하며 그를 돕는다.



프랭크는 펜실베니아의 러셀과 시카고의 지미 사이를 오가며 갖가지 문제들의 해결사 역할을 해준다. 입이 무겁고 시키는 일은 뭐든 깔끔하게 처리하는 프랭크는 러셀과 지미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간다. 러셀은 프랭크를 가족처럼 아끼고, 지미는 프랭크에게 노조 지역위원장을 맡기면서 절친으로 여긴다. 그렇게 페인트공이자 트럭 운전사였던 프랭크는 마피아의 실세이자 노동운동가가 되어 간다.


프랭크에겐 딸만 넷이 있는데 딸들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막내딸 페기(안나 파퀸)는 아버지가 하는 폭력적인 일을 끔찍하게 여겨 말도 하지 않았다.


TV를 통해 JFK 암살 소식을 접하는 프랭크 시런과 지미 호파


프랭크, 러셀, 지미의 호시절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러셀은 케네디를 밀었지만 지미는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악연이 있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했고 로버트는 지미를 철저하게 감시해 급기야 사기죄로 기소한다. 이후 케네디는 암살당하지만 지미가 감옥에 가야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 닉슨이 대통령이 되자 지미는 출소한다. 그는 노조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다가 러셀과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프랭크는 두 사람을 중재하려 하지만 지미는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영화 중반부까지의 줄거리다. 한 남자가 마피아의 청부업자가 되어 온갖 범죄에 가담하는 과정이 숨가쁘게 전개된다. 실존 인물을 포함한 수많은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자막으로는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준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오랫동안 마피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범죄자를 미화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실력자의 허락만 있으면 쉽게 사람을 겁박하고 죽이는 시대에 케네디 형제 암살, 닉슨의 도청 사건 등도 무감하게 다가온다. ‘갱스 오브 뉴욕’(2002)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지만 스콜세지 영화에서 미국은 피 위에 세워지고 피 위에서 번영을 누리는 나라다.


프랭크 시런과 지미 호파


러닝타임 3시간 29분 중 영화의 고갱이는 후반부에 있다.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1975년 지미 호파 실종사건의 유력한 범행 가설(실존 인물인 프랭크 시런은 2003년 83세로 사망하기 전 자신이 호파를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FBI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을 보여준 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노인이 된 프랭크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범죄집단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못하던 프랭크의 삶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노인이 된 프랭크를 한참 동안 묘사하면서 묻는다. 그는 뒤늦게 종교에 귀의하고 딸을 찾지만 사실 그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단지 운이 좋아서 홀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하비 케이틀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그동안 수많은 범죄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영화 ‘아이리시맨’의 후반부는 지금껏 그들이 참여해온 영화들의 후일담 역할을 한다. 복수라는 미명 하에 서로를 죽고 죽이며 자신들이 시대를 주름잡고 있다고 여겼던 갱스터들은 어느 순간 본인도 똑같은 죽음을 당하며 사라졌지만,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뒷이야기는 지금껏 어느 갱스터 영화에서도 이만큼 생생하게 묘사된 적 없어서 신선하다. 배우와 제작진이 70대의 나이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뭉클하게 남는다. 스콜세지와 함께 오랫동안 작업해온 델마 슌메이커의 편집 솜씨는 후반부에 빛을 발한다.



영화는 로튼토마토에서 96%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고 연말 각종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다투고 있다.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강력한 작품상 후보가 될 것이 확실시된다.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는 말로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스콜세지는 유머와 페이소스와 인생의 부조리함을 모두 담아낸 이 영화를 통해 영화란 과연 무엇인지를 스스로 증명한다.


사실 ‘스콜세지’라는 이름은 1970년~1990년대 미국에서 마블에 버금가는 하나의 장르였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갱스터, 위태로운 우정, 고립된 남자의 복수, 기독교식 구원 등이 스콜세지의 세계다.


영화 ‘아이리시맨’에는 스콜세지 세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주연 배우들 뿐만 아니라 제작 어윈 윈클러, 각본 스티븐 제일리언, 음악 로비 로버트슨, 편집 델마 순메이커 등 오랫동안 스콜세지와 함께 작업해온 사람들이 다시 뭉쳤다. 윈클러는 이 영화에 대해 "꼬마였던 시절부터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을 한데 모은 영화"라고 정의했다.


지난 9월 27일 뉴욕영화제에서 열린 '아이리시맨' 시사회에 앞서 포즈를 취한 조 페시, 알 파치노, 마틴 스콜세지, 하비 케이틀, 로버트 드니로(왼쪽부터)


‘비열한 거리’(1973)에서 갱들이 접수한 거리를 활보하던 로버트 드니로, ‘코미디의 왕’(1983)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좋은 친구들’(1990)에서 혼을 빼놓는 조 페시의 수다,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1950년대 히트곡 ‘In the Still of the Night’, (스콜세지 영화는 아니지만) ‘대부 2’(1974)에서 사람을 홀리고 ‘여인의 향기’(1992)에서 왈츠를 추던 알 파치노까지 그때 그 시절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는 스콜세지 감독의 페르소나인 로버트 드니로가 2004년 찰스 브랜트의 소설 ‘자네가 페인트를 칠한다고 들었네(I Heard You Paint Houses)’를 영화로 만들 것을 스콜세지에게 제안한 뒤 15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스콜세지는 그 사이 3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고 2014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 2017년 촬영이 이뤄졌다.


드니로가 스콜세지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번이 무려 9번째다. ‘아이리시맨’ 이전 마지막 스콜세지-드니로 영화는 ‘카지노’(1995)였다.



반면 스콜세지와 알 파치노가 만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다. 스콜세지는 1970년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에게 파치노를 소개받은 뒤 무려 49년만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 그동안 영화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번번이 제작이 무산됐다.


할리우드 메소드 연기의 양대 산맥이던 드니로와 파치노는 ‘아이리시맨’에서 네번째로 만났다. 이전 세 편의 영화는 ‘대부 2’ ‘히트’(1995) ‘살인의 함정’(2008)이었다.


지난 9월 30일 로버트 드니로, 마틴 스콜세지, 알 파치노(왼쪽부터)가 영화 '아이리시맨' 홍보를 위해 포트레이트 사진을 촬영했다.


드니로는 24세의 젊은 나이부터 80세까지 다양한 시대의 프랭크를 ‘직접’ 연기한다. 드니로 뿐만 아니라 페시, 파치노, 케이틀 등 지금은 노인이 된 배우들이 CG를 통해 젊어졌다. 그들은 젊은 얼굴에 맞춰 동작이나 표정도 더 활동적으로 연기해야 했다.


영화 프레임마다 CG가 쓰이면서 제작비는 당초 책정된 예산인 1억달러에서 1억5900만달러로 치솟았다. 이 금액은 스콜세지 영화 중 가장 높은 액수로 마블의 ‘스파이더맨: 파 프럼 홈’(1억6000만달러)에 맞먹는다. 넷플릭스가 투자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기 힘들었을 영화다. 그전에 이 영화를 배급하려던 파라마운트, STX엔터테인먼트 등은 치솟는 제작비에 놀라 두손을 들고 포기했다.


‘아이리시맨’은 넷플릭스를 통해 11월 27일 전세계에 공개됐다. 극장에선 20일부터 상영 중이다.


아이리시맨 ★★★★☆

돌아온 이탈리아 갱들. 그 뭉클한 후일담.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1/27221/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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