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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한국영화 세 편이 맞붙었습니다.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타짜: 원 아이드 잭'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등 서로 다른 개성의 영화들입니다. 이번 추석 연휴는 주말이 겹쳐 4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100억원 가까이 들인 작품이 3편이나 동시에 걸렸으니 한국영화 전체로 보면 제살 깎아먹기 경쟁입니다. 내 영화는 '럭키'하게 '범죄도시'처럼 승자가 될 거라는 최면 같은 게 작용하나 봅니다. 작년 추석에도 '안시성' '협상' '명당'이 3파전을 벌여 '안시성'만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고 두 편은 패자가 됐죠. 올해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추석 한국영화 3편


그나마 올해 추석영화들은 제작비를 다이어트해 위험을 줄였습니다. 세 편 중 '타짜'가 총제작비 110억원(손익분기점 260만명)으로 가장 많은 돈을 들였고, '나쁜 녀석들' 총제작비 105억원(손익분기점 255만명), '힘을 내요, 미스터 리' 총제작비 89억원(손익분기점 200만명) 순입니다. 작년 총제작비 215억원을 들인 '안시성'에 비하면 확실히 안전한 선택을 한 셈입니다.


추석 연휴를 포함한 일주일 성적표를 보면 '나쁜 녀석들'만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일 기준 관객 301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타짜'는 182만명, '힘을 내요 미스터 리'는 96만명으로 더 힘을 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세 편의 관객을 모두 합하면 579만명입니다. 이는 작년 추석 연휴를 포함한 7일간(2018년 9월 20일~26일) 한국영화 세 편이 불러 모은 관객 약 650만명에 비해 70만명가량 줄어든 수치입니다. 연휴가 예년보다 짧기도 했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 탓도 있을 겁니다. 객관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영화 평점을 살펴보면 작년 세 편의 네티즌 평점 평균은 8.18이었던 반면 올해 세 편의 네티즌 평점 평균은 8.0으로 떨어졌습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갯수도 세 편 합해 3만8000건에 불과한데 이는 940만 관객을 기록한 흥행작 '엑시트'의 11만건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그만큼 추석영화 세 편에 대해 온라인 입소문이 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죄 액션, 도박 스릴러, 코믹 드라마 등 올해 추석영화 세 편은 각자 확실한 포지션을 갖고 있어서 일단 영역 침범은 피했습니다. 무거운 사극이나 정치사회극이 없는 대신 모두 가볍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듦새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저는 연휴 첫날 극장에서 세 편을 몰아보기 했는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세 편 다 실망스러웠습니다. 과거 인기 있던 레시피를 짜깁기해서 냉장 보관한 재료로 뽑아낸 눅눅한 요리를 맛본 기분이었습니다.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우선 OCN의 인기 드라마를 영화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나쁜 녀석들: 더 무비'는 드라마 시즌1에서 이어지는 설정인데 구성이 무척 투박합니다. 에피소드들의 연결은 툭툭 끊어지고, 개연성과 인과관계는 실종돼 이들이 왜 목숨 걸고 재능기부(?)에 나섰는지 납득하기 힘듭니다. 일본 야쿠자까지 등장할 정도로 판이 커졌는데 여전히 맨몸으로 격투를 벌이는 것도 너무 나이브합니다. 한일전이 되면서 '국뽕'을 의식한 대사들도 단편적입니다.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영화를 끌고가는 힘은 캐릭터의 매력에서 나오는데 김상중의 침착한 분노와 마동석의 묵직한 펀치와 썰렁한 유머는 드라마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동석은 지난 5월 개봉한 '악인전'에서도 연쇄 살인범을 잡는 조폭 두목을 연기한 적 있는데 비슷한 캐릭터를 맴도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화려한 존재감을 선보이며 등장한 능청스런 사기꾼 곽노순을 연기한 김아중 덕분에 영화는 활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곽노순의 비중이 작아지며 전반부의 존재감이 묻혀 안타까웠습니다.


힘을 내요, 미스터 리


'힘을 내요, 미스터 리'의 경우,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제작의도는 훌륭하지만 그밖의 모든 요소들은 2019년 신작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식상합니다. 지체장애, 백혈병 걸린 딸, 조폭 등 뻔한 캐릭터들이 뻔한 스토리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지체장애 주인공이 의외의 딸을 알게 되는 과정과 그 딸의 불치병 치료기로 웃기다가 울리겠다는 제작의도가 너무 선명해 영화 보는 내내 공식이 정해진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럴 땐 영화를 끌고 가는 차승원이 연기력으로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그는 정신지체를 연기하는데 집중하느라 다른 데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어 보입니다. 재치있는 전작 '럭키'로 3년 전 가을 700만 관객을 모은 적 있던 이계벽 감독은 이번엔 지나친 안전운전을 했습니다. 코미디에 사회성을 녹인 착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2년 전 추석 연휴에 개봉한 '아이 캔 스피크'가 떠오르지만 접근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큽니다. 조금 더 신선한 캐릭터와 플롯으로 승부했더라면 결과도 좋지 않았을까요.


타짜: 원 아이드 잭


'타짜: 원 아이드 잭'은 캐릭터, 스토리 등 모든 부분에서 아쉬웠습니다. 도입부는 괜찮았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인 주인공 도일출(박정민)이 "금수저와 공정하게 경쟁할 길은 도박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최근 조국 딸 사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청년세대의 현실을 풍자한 전작 '돌연변이'를 만든 권오광 감독다운 결기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습니다.


타짜: 원 아이드 잭


'타짜'는 한국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캐릭터 무비인데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설계가 엉성합니다. 박정민은 (조승우와 비교하면) 독기가 부족해 목숨 걸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까치(이광수)와 영미(임지연)가 주고받는 대사는 너무 시대착오적이라 최근 한국영화의 성인지감수성 개선이 다시 퇴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애꾸(류승범)와 마돈나(최유화)는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지만 영화 플롯 속에서 쓰임새는 기능적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추석영화 세 편은 실망스러웠지만 이로 인해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기생충' '엑시트' 등 기억할 만한 영화는 매년 꾸준히 나오고 있고 '극한직업'처럼 예상 외로 관객의 큰 사랑을 받는 영화도 있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시즌을 겨냥한 텐트폴 영화들은 맥을 못추고, 의외의 영화들이 선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복기해 볼 만합니다. 돈을 많이 들였기에 더 많은 고려를 한 영화들이 사실은 더 안일한 기획일 수 있다는 것이죠.


한국영화 시장은 최근 몇 년 새 디즈니와 한국영화의 양강구도로 재편됐는데, 마블을 포함한 디즈니의 고퀄리티 프랜차이즈 무비에 대항해 꿋꿋하게 점유율을 지켜오고 있는 힘은 관객과의 깊은 유대감, 한 발 앞서는 기획력, 할리우드에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 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한국영화가 더 분발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09/26667/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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