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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에 무려 30만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2017년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회고전엔 47만 8082명의 관람객이 찾았습니다. 이는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하는군요.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2018년 11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선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an Artist, 1972)'이 9030만 달러에 팔려 생존 작가 중 최고가를 경신했습니다(이 기록은 2019년 5월 제프 쿤스의 '토끼'가 기록한 9107만 달러에 의해 깨집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인기는 록스타 못지 않습니다. U2의 보노가 올해 말 한국에 올텐데 호크니 만큼의 인기를 증명할 수 있을지 두고봐야겠네요.


호크니는 왜 이토록 인기가 많을까요? 저는 지난 봄 호크니 전시회를 찾았다가 아침부터 줄 선 관객들을 바라보며 문득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물론 그가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이고, 금발 머리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자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을 만큼 패셔너블한 영국인이라는 점이 인기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인기 비결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호크니 그림의 4가지 특징


호크니 작품의 소재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보면 LA의 집과 수영장, 가족 친구 연인 등 사람, 요크셔의 자연, 푸른 기타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소재로도 그렸습니다만 제게 임팩트가 남아 있는 그림은 네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발견한 특징은 시원하고 화려한 색감, 복잡한 단순화, 무표정, 압도적 스케일 등입니다.


우선 호크니는 화려한 색깔을 과감하게 쓰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노란색, 빨간색, 녹색, 파란색 등이 도드라집니다. 보통 원색을 쓰면 촌스럽거나 유아틱해보여서 꺼리게 됩니다만 호크니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가끔 야수파의 길을 개척한 마티스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호크니가 사용한 생생한 컬러는 ‘마티스의 팔레트’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복잡한 단순화’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 같지만 더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네요. 수영장을 그린 작품을 보면 건물, 산 등 배경은 참 단순한데 물만 복잡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 복잡함으로 인해 물이 정말로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물은 고요하다가도 일렁이기 시작하면 한없이 흔들리죠. 그 모습을 화폭에 정지된 모습으로 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작품마다 물의 무늬가 전부 다르게 보이는 것도 독특합니다. 물의 모양은 볼 때마다 다르잖아요. 같게 그릴 수가 없겠죠.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인상파의 철학과 닮았는데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인상파가 하나의 시점에서 한 순간을 포착한 것과 달리 호크니는 다중 시점에서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인상주의를 결합한 것이 호크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난 8월 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호크니’에서 그는 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은 어느 지점을 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에요. 반사된 부분이나 물 표면을 보다가 갑자기 물속을 볼 수도 있죠.”


Beverly Hills Housewife (1966)

A Bigger Splash (1967)

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Rain (1973)

My Parents (1977)

Model with Unfinished Self-Portrait (1977)


호크니는 부모, 친구, 동료, 연인 등을 대상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만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표정이 없습니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거나 그림자가 져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한참 생각해 봤는데요.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하려 한 걸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제 나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물을 여러 각도에서 쳐다보면서 물의 무늬를 다각도로 묘사한 원리와 인간의 표정을 그린 원리가 같지 않았을까요? 여러 각도에서 보면 결국 인간에겐 표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웃는 순간도 있고, 우는 순간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엔 표정이 없습니다. 호크니는 표정이 없는 순간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호크니의 후기작들은 압도적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1970년대부터 콜라주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벽면 하나를 통째로 작품으로 채웠습니다. 또 2005년 잉글랜드 요크셔로 돌아와 자연을 그리는 작업을 하면서도 캔버스를 이어 붙여 거대한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콜라주 작품들은 여러 시점에서 본 하나의 광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More Felled Trees on Woldgate (2008)

Winter Timber in Bridlington (2009)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2011)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를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에 설치하는 모습 (2019)


본래 우리의 눈은 완벽하지 않아서 오른쪽 눈과 왼쪽 눈 사이 거리만큼 시점이 달라 왜곡이 발생하는데 이를 두뇌의 처리장치가 제어하는 식으로 작동합니다. 즉,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하는 것이죠. 호크니의 콜라주 작품들은 이를 시점대로 다시 분해합니다. 그래서 그랜드 캐년 같은 거대한 자연이 조금씩 엇갈려서 하나의 거대한 퍼즐로 맞춰집니다.


영화 ‘호크니’에서 그는 그의 작업이 새로운 원근법에 대한 실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것보다 큰 게 좋습니다. 원근법은 그동안 하나의 소실점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더 넓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폰의 파노라마 기능은 방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는 하나의 사진을 만들어 주는데 소실점을 찾으려면 사진을 둥글게 말아 놓고 한가운데에 서야 합니다. 평면 사진으로 보고 있으면 소실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15세기 피렌체의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코가 원근법을 발견한 이래 미술은 원근법의 소실점을 철칙처럼 지켜왔는데 호크니는 그림 속 하나의 소실점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보는 방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술관의 4면에 자연을 묘사한 거대한 작품 4점을 걸어놓고 가운데 관객이 설 때 관객 위치가 소실점이 되도록 설계하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또 작품마다 소실점이 다른 그림을 여러 개 콜라주해 전체를 하나로 볼 땐 소실점이 여러 개 난무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Billy & Audrey Wilder in Los Angeles (1982)

Still Life Blue Guitar (1982)

Pearlblossom Hwy (1986)

A Bigger Grand Canyon (1998)


남들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그리다


호크니의 그림은 한눈에 들어옵니다. 현대미술 하면 떠오르는 ‘넘사벽’ 난해함과 전혀 달리 첫 인상이 매우 친절합니다. 수영하고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을 그리거나 혹은 자연이나 사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주 따뜻하지도 않고 아주 차갑지도 않습니다. 감정을 밑바닥에서 끄집어내는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뚱멀뚱 거리감을 두게만 하는 그림도 아닙니다. 어쩌면 매우 단순해서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그림들입니다.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웨스트요크셔주 브래드퍼드에서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브래드퍼드는 잉글랜드 중북부 리즈 옆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산업혁명 이후 양모 무역의 허브였습니다. 호크니의 형 폴은 브래드퍼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59년 호크니는 런던으로 이사해 왕립예술대학(RCA)에 다녔습니다. 대학 동문 중에는 영화감독 리들리 스코트를 비롯해 패션 디자이너 오시 클라크, 세리아 버트웰 등이 있습니다. 클라크와 버트웰은 1969년 결혼했는데 이때 호크니가 들러리를 섰습니다. 1971년 두 사람이 노팅힐 아파트 창가에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클라크 부부와 퍼시’는 호크니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에선 신혼부부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1974년 이혼했습니다.


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1)


호크니가 대학을 다니던 1959~1962년은 추상주의가 대세인 시대였습니다. 액션 페인팅을 창안한 잭슨 폴록은 슈퍼스타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호크니 역시 대학 시절엔 추상화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추상화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사람의 얼굴을 그려왔습니다. 이제와서 갑자기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호크니가 추상주의를 완전히 배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피카소의 열렬한 추종자일 만큼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추상주의 철학에 매료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그린 재현주의적인 그림에 추상성을 가미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그만의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호크니는 1년 뒤 런던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모든 작품이 다 팔릴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호크니의 시작은 이처럼 처음부터 화려했습니다. 많은 대가들이 겪었던 무명의 설움이나 배고픈 시절이 호크니에겐 없었습니다. 피카소처럼 말이죠.



첫 개인전에서 번 돈으로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예술의 불모지로 여겨졌지만 호크니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캘리포니아엔 그에게 영감을 주는 할리우드가 있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에게 할리우드는 또다른 창작의 자양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월트 디즈니를 존경해 '위대한 미국 아티스트'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의 뮤즈이자 첫 번째 연인 피터 슐레진저를 처음 만난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그는 동성애가 금지됐던 시대에 커밍아웃한 게이로 공개연애를 즐겼으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자유지대(캘리포니아)에 살았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호크니는 UCLA에서 미술 강의를 했는데 11살 차이 나는 피터가 학생으로 참석했습니다. 피터는 호크니의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Peter Getting Out of Nick's Pool (1966)


피터와의 사랑은 그러나 1972년 종말을 고합니다. 피터와 헤어진 뒤 호크니는 그림을 제대로 완성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나라가 망하는 날,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죠. 세상이 멀쩡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또 이런 말도 남겼는데요. 로맨티시스트였던 호크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랑의 부재는 곧 두려움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두려움이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A Bigger Splash'(1974)에서 '예술가의 초상'을 작업하는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은 피터와 헤어진 후 그의 사진을 보며 그린 작품입니다. 수영을 하는 남자는 피터의 새 연인이라고 합니다.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호크니의 작업 방식입니다. 이때 그는 꼭 흑백사진을 찍었습니다. 어차피 똑같은 색을 구현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고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호크니의 지론입니다.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사용하는 도구들은 눈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사진에 대한 호크니의 감정은 양가적입니다. 그는 사진작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 정지된 순간은 비현실적입니다. 드로잉이나 그림에 있는 생생함이 사진엔 없습니다.”


사진으로 그림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호크니의 포토콜라주 작품을 보면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사진을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The Old Guitarist from The Blue Guitar (1976)

The Blue Guitar (1977)


신기술을 적극 받아들인 예술가


호크니는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이를 자신의 작품 활동에 적극 응용한 예술가입니다. 붓만 고집한다거나 옛 것이 최고라는 생각은 그에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대상을 표현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데에는 누구도 고집을 꺾을 수 없는 화가였지만, 테크놀로지에 있어서는 대단히 개방적이었습니다.


호크니는 1967년부터 35미리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촬영한 뒤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970년대부터는 사진 여러장을 출력해 거대한 작품으로 만드는 포토콜라주 작업을 시작했고, 1980년대엔 포토콜라주에 폴라로이드를 활용했습니다.


영화 ‘호크니’에는 1980년대 컬러TV를 처음 구입한 호크니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호크니는 TV 화면의 컬러를 색상조정 기능에 따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그는 RGB를 조절해 화면에 붉은 기운이 감돌게 하면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 봐, TV를 마티스 스타일로 볼 수도 있어!”


1990년 레이저 팩스기기가 출시된 후엔 팩스의 출력 기능을 이용해 흑백 포토콜라주를 시도했습니다. 2009년 아이폰이 나온 뒤엔 아이폰으로 그렸고 2010년부터는 아이패드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은 히스토리가 그대로 남기 때문에 작품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아이패드를 활용한 덕분에 이젠 그의 작업 과정까지 엿볼 수 있게 됐습니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기술이 두려워질 법도 한데 호크니는 테크놀로지를 자신의 작업에 이용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자기확신이 있기에 이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겠죠.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리든, 아이패드에 손가락으로 그리든 호크니는 호크니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

Self Portrait (2012, iPad)

Garden with Blue Terrace (2015, iPad)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매체가 나올 때마다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되는데 호크니는 이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즉, 자신만의 시각이 분명하다면 매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매체를 선택하든 그 매체에 맞는 구현 방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풍경화는 캔버스에 그린 풍경화와 비슷하지만 느낌이 다릅니다. 더 흐릿하게 뭉툭하고 질감은 대상과 유리된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복제 가능한 컴퓨터 그림보다는 직접 붓으로 그린 그림에서 더 생생한 아우라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호크니는 아이패드 드로잉에서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습니다.



호크니가 첫 개인전을 연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그를 관통하는 일관된 철학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대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서 지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런 생각의 결과물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명확해서 과연 숨은 철학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작품들을 묶어놓고 보면 하나의 호크니 세계관이 보입니다. 대중은 이를 발견해 그를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겠죠. 영화 ‘호크니’의 도입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그것을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된다면 사람들이 반응하겠죠.”



대중친화적인 크리에이터


마지막으로 저는 호크니의 대중 친화적인 성격이 그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언제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각종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이 작품을 그린 의도를 말해왔습니다. 또 패셔너블한 의상으로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냈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가 주최하는 파티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외골수적인 면모로 대중과의 소통을 소홀히하는 것과 다른 행보입니다. 예전에야 골방에 틀어박힌 예술가들이 ‘신비주의’로 궁금증을 유발했겠지만 지금 과잉 콘텐츠 시대엔 적확한 자기홍보야 말로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호크니는 시대를 앞서간 자기홍보의 달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호크니가 마냥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업할 땐 굉장히 고집 센 예술가였습니다. 남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이런 그에 대해 “귀가 어둡고 무례하다“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관대했습니다. 호크니에게 이와 같은 이중적인 면모가 없었더라면 그가 평생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1990년 그는 기사 작위를 거절했는데요. 호들갑 떠는 게 싫다는 이유였습니다.


영화 ‘호크니’의 카피로도 쓰인 호크니의 이 말은 예술가로서 호크니를 잘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Self Portrait with Red Braces (2003)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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