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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의 자스민(나오미 스콧)은 자파(마르완 켄자리)와의 결혼을 생각해 보라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한다.


“전 자파와 결혼하지 않아요. 자파가 술탄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제가 직접 술탄이 되려고 해요. 저에게 술탄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알라딘'의 자스민


디즈니 역사에서 이토록 권력욕을 드러내는 여성 메인 캐릭터는 전무후무하다. 1992년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상징하는 노래가 ‘A Whole New World’였다면 2019년작 ‘알라딘’의 대표곡은 나오미 스콧이 부르는 ‘Speechless’다. 조용히 하라고 해도 절대 침묵하지 않을 것이고, 수백년 낡은 잣대를 들이대도 울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노랫말은 의미심장하다.


'토이 스토리 4'의 보 핍


‘토이 스토리 4’의 도입부에서 보 핍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우디를 바라보던 인형이었다. 우디와 헤어질 때만 해도 여리여리했던 그녀는 수년 후 당찬 모습으로 돌아온다. 세 머리 양(빌리, 고트 그루프), 기글 맥딤플스, 스컹크 등 친구들과 함께 야생을 누비며 개척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우디를 다시 만나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냐. 훨씬 자유로워졌어.”


'맨 인 블랙: 인터내셔널'의 에이전트 M과 H


‘맨 인 블랙: 인터내셔널’에서 새로운 에이전트 M(테사 톰슨)은 검정 수트를 입고 외계인을 상대하는 ‘맨 인 블랙’의 일원이 되기를 어릴 적부터 갈망하던 여성이다. 선배 에이전트 O(에마 톰슨)는 M에게 조직에 대해 브리핑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맨 인 블랙’이라니. 근데 다들 그 이름에 대한 애착이 강해. 그러니 그 문제는 일단 접어두자고.”


‘맨’이라는 명칭은 바꿀 수 없었지만 영화는 여성 에이전트의 활약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전 시리즈와 차별화된다. M은 크리스 헴스워스가 연기한 에이전트 H와 듀오를 이루면서 종횡무진한다. 재미있는 것은 M과 H 중 성적 대상화가 되는 사람이 남자인 H라는 것이다. 영화는 H의 상반신 누드를 보여주고 M은 H의 외모에 끌려 그에게 접근하는데 이 같은 설정은 뒤바뀐 성역할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변신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패트리샤 아퀘트가 “미국의 여성 배우에게도 남성 배우와 동일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됐는데 거짓말처럼 그날을 기점으로 할리우드에서 여성 배우들이 차지하는 위상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했다.


할리우드가 변화한 이유를 창작자들의 인식 변화나 (미투운동 같은) 시대정신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관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다면 이같은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레이


기폭제가 된 작품은 2015년 말에 개봉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였다. 스타워즈 7,8,9편을 이끌고 갈 새로운 제다이 주인공 레이(데이지 리들리)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팬들 사이에 논란이 팽팽했지만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북미에서 9억 3600만 달러로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깨지 못한 역대 1위의 흥행 기록을 세우며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다.


또 그해 샤를리즈 테론을 카리스마 넘치는 전사로 만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레베카 퍼거슨을 톰 크루즈에 맞먹는 비중으로 기용한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에밀리아 클라크를 내세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등이 잇따라 흥행 성공하며 할리우드 프랜차이즈는 점점 여성 중심으로 변화해가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의 변화를 이끈 것은 흥행 성적이었다. 프랜차이즈 영화를 여성 주연으로 만들어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아니 오히려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2015년말 흥행 리스트로 증명됐고, 그 이후 여성 주인공 프랜차이즈는 할리우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스타워즈’로 큰 성공을 맛본 디즈니가 변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디즈니의 자회사 마블은 지난 3월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 ‘캡틴 마블’을 선보인데 이어 그동안 망설였던 ‘블랙 위도우’ 단독 영화도 준비중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여성 캐릭터들의 연대를 더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엑스맨: 다크 피닉스'


지난해 디즈니가 인수한 20세기폭스는 ‘엑스맨: 다크 피닉스’를 기획하면서 슈퍼히어로 영화 최초로 주인공과 악역을 모두 여성에게 맡겼다. 디즈니의 전통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알라딘’은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스민 캐릭터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고, 올해 말 개봉을 앞둔 ‘겨울왕국 2’는 엘사와 안나 자매의 자기 중심적인 면모를 더 강화할 예정이다. 또 여성 주연의 프랜차이즈 '말레피센트' 속편이 가을에 개봉하고, 원주민 여성이 주인공인 '뮬란' 실사 영화도 내년 선보인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의 기존 공식은 톰 크루즈, 맷 데이먼, 휴 잭맨,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중년 남성 스타들이 전세계를 누비며 악당에 맞서는 것이었다.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의 조력자 혹은 비주얼 담당에 머물렀다. 극장을 찾는 관객 중 여성 비율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이런 관행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더 이상 이런 공식으로 제작되지 않는다. 남성 주인공이 찾아와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여성들은 이제 과거 유산이 됐다. 영화 속 여성들은 결혼따위 필요없다고 말하며 왕이 되기를 꿈꾸고,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리더 역할을 한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홍일점이었던 여성 캐릭터들은 이제 압도적인 파워를 갖고 악당과 맞짱 뜨는데 이러한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마녀'


변화의 흐름을 만든 것은 관객이다. 흥행 성적이 곧 투자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절대적으로 미흡하다. 여전히 주요 영화의 주인공은 중년 남성이다. 작년 개봉한 중대형 규모 영화 39편 중 여성 주연 영화는 ‘마녀’ ‘리틀 포레스트’ ‘미쓰백’ ‘협상’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5편에 불과했다. 올해도 '걸캅스' '언니' ‘페르소나’ 등 겨우 손꼽을 정도다. 성공 사례가 적으니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모험하는 창작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마녀’ 속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은 가뭄에 단비다. 할리우드가 드라마틱하게 변화한 것처럼 한국영화에도 곧 계기가 생기길 기대한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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