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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교수는 건축의 기본은 공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주변에 관심 갖고, 또 가고 싶은 곳을 이해한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는 승민과 서연은 서울을 함께 여행한다. 정릉에서 개포동까지. 또 가보고 싶은 기차역 철로 위를 걷는다. 숙제인지 데이트인지 모를 여행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들의 감정은 우정일까 사랑일까?


한국 로맨스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둔 <건축학개론>은 90년대 학번의 30대에게 대학 새내기 시절의 추억을 선물하는 녹음테이프 같은 영화다. 당시에는 녹음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이 영화에서도 전람회 1집 CD 대신 녹음테이프를 건네주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음악은 정품 CD로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라면) 영화에 빠져들었다.


추억 속에 빠져들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몰입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현재의 승민, 서연이 과거의 승민, 서연과 잘 매치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엄태웅과 이제훈, 한가인과 배수지는 사실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일단 생김새부터 너무 다르고 배우로서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도 전혀 다르다. 특히 이제훈이 엄태웅의 과거라는 사실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이 안됐다. (이 부분에 대해 납득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엄태웅이 이 시나리오를 알아본 덕분에 2003년부터 충무로에서 돌고만 있었던 시나리오가 9년만에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하니 단지 캐스팅의 실패만을 탓하기에는 영화가 겪어온 우여곡절이 너무 안쓰러워 보인다.


 


어쨌든 시나리오를 알아보는 투자자가 없어서 주인공 두 명을 캐스팅하는 것도 힘들었던 이 영화가 과감하게 과거와 현재에 전혀 다른 배역으로 두 쌍의 더블 캐스팅을 이루어낸 것은 그만큼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 과거의 습작과 현재의 기억은 다르다는 것. 그때의 기억의 습작은 너에게 들려줄 내 마음을 담은 노래였지만, 지금의 기억의 습작은 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노래라는 것. 그때 승민과 서연이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음악을 나눠 들었다면 이제는 서연이 홀로 이어폰 양쪽을 다 끼우고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한다. 그것은 건축을 통한 화해다. 서연이 자신의 추억이 담긴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기로 결정하면서 승민은 2층을 만드는 새로운 설계를 적용한다. 그리고 서연은 완공된 집의 2층에서 맨발로 잔디밭을 밟고 바다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나아감으로서 과거의 승민과 만난다. 그 좁은 통로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흔히 <건축학개론>이 건축을 로맨스 영화와 섞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하지만, 사실 <시월애>를 비롯한 이현승 감독의 영화들에서 건축은 자주 등장했었다. 다만 이현승 감독의 영화가 화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멋진 건축물을 등장시켰다면,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건축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두 사람의 감정선을 일치시켰다는 것이 다르다. 더 진화한 건축 로맨스인 셈이다.


 


지금까지 수줍은 첫사랑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그런데 '30대의 첫사랑'을 다룬 이 영화가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뭘까? <건축학개론>이 90년대 중반의 연애의 보편성을 담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당시의 연애가 모두 저런 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첫사랑은 손예진, 조승우가 <클래식>에서 보여주었던 60년대식 첫사랑과 별로 다른 게 없어 보인다. 첫사랑이라는 감정의 원형을 끌어와서 순수한 느낌의 두 배우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 새내기들은 비슷한 느낌의 말못하는 첫사랑에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첫사랑의 이미지다. 따라서 이 영화가 공감을 얻은 부분은 첫사랑보다는 30대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90년대 학번은 영화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었다. 노스탤지어는 70~80년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몫이었다. <친구>나 <써니> 혹은 <범죄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 90년대에 20대에 입성했던 사람들이 30대 중반이 되었다. 필자의 경험에서 비춰보건데 그들에게 90년대는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였다. 하지만 막상 숫자를 세보면 열 손가락을 다 세고도 더 지나가야 하는 시대가 90년대다. 가까운줄 알았지만 이미 강산이 한 번 변한 시대, 그래서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시대, 하지만 여태껏 몰랐다가 이제 막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등장한 영화가 <건축학개론>이다.


전람회, 마로니에, 펜티엄, GUESS(혹은 GEUSS), 헤어무스 등등. 영화를 보고나면 그 시대의 고증에 대해 나눌 추억이 많아진다. 문화계는 비로소 그 사실을 눈치 챘고 이 영화를 필두로 90년대에 활동했던 가수나 배우 혹은 당시 유행하던 상품들이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90년대도 이제 추억이 팔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연 배우인 한가인, 배수지, 엄태웅, 이제훈. 연기력 순으로 다시 나열하자면 이제훈, 한가인, 배수지, 엄태웅. 이제훈은 어디까지 포텐셜이 터질지 한계를 알 수 없는 배우다. 한가인은 과거의 첫사랑 앞에서 숨겨놓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는 감정을 잘 연기했다. 배수지는 인터뷰를 보니 인물들의 감정을 잘 모르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친구관계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한다. 실제 대학 1학년인 자신의 나이에 꼭 맞는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게 오히려 신선하다. 그리고 꼭 언급해야 할 배우는 '납득이' 조정석. 이 영화에서 시종일관 웃음을 선사하는 새로운 코믹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흥행에서 실패했지만 만듦새는 호평받았던 <불신지옥>을 만들었던 이용주 감독은 <건축학개론>을 통해 최근 가장 행복한 감독이 되었다. 흥행과 비평에서 동시에 성공한 몇 안되는 감독이다. 그리고 최근들어 공포영화로 데뷔한 감독이 두번째 영화를 만들어 재기한 선례가 거의 없다는 저주도 깼다. 그 성공의 이면에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한 제작자 심재명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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