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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억.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투입한 <마이웨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과 장동건의 의기투합. 거기에 오다기리 조와 판빙빙이라는 일본, 중국의 인기 배우를 캐스팅하고, 러시아, 프랑스에서의 실감나는 대형 스케일의 전투 장면을 보여준 영화. 그런데 왜 이 영화는 투자자인 CJ와 SK에게 재앙이 되었을까?



1. 신선한 소재의 낡은 해석


<마이웨이>의 김준식이라는 인물은 분명히 한국인으로서는 드문 인생을 살았다. 한국인이 노르망디 전투에 독일군으로 참전해 죽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아마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정말 흥미진진할 것 같다. 더구나 그는 손기정처럼 마라토너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어느날 일본군에 징집되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에 포로를 거쳐 결국 프랑스의 해변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스토리가 특이한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소련과 독일에서 고생하다가 죽었다는 게 전부다. 또 장동건이 연기한 이 인물은 장동건에게서 느껴지는 선량한 인상 만큼이나 착하다. 물론 착하다는 것이 결코 단점이 될 수 없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캐릭터만큼 단조로운 것도 없다.



영화는 직선 코스의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연대기 순으로 진행된다. 어느날 일본군이었다가 다음날 소련군이 되고 또 독일군이 되는 과정이 나열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보니 극적인 느낌보다는 자연스런 느낌이 더 든다. 만약 감독이 그걸 개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김준식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것은 그가 왜 소련군복과 독일군복을 입고 있었느냐여야 했다. 자연스러움에 집착하기보다는 파격적인 편집으로 공간을 옮겨가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전쟁 장면만 부각시키고 있기에 영화는 신선한 소재를 낡은 방식으로 요리하고 있다.



2. 앞서간 주제


만약 이 영화에서 김준식과 동료애를 나누는 사람이 타츠오라는 일본 장교가 아닌 북한 사람이었다면 영화는 훨씬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을지 모른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고지전>은 되고 <마이웨이>는 안된 이유. 그것은 <마이웨이>가 그리고 있는 우정이 일제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우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작진은 그들의 우정을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 관객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영화를 보면서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관객들은 굳이 불편한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리스크가 큰 논쟁적인 주제를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서 다루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다른 문화권에서 생각해보자. 헐리우드에서 나찌 시대의 휴머니즘을 영화로 다룰 수 있던 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휴머니티를 다룬 블록버스터가 가능할까? 또 할리우드에서 미국인과 알카에다 조직원과의 휴먼 스토리가 가능할까? 독립영화로서 시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대규모 블록버스터는 아닐 것이다. <마이웨이>는 너무 모험적인 선택을 아무 고민도 없이 했다.




3. 전쟁영화의 쇠퇴기


전쟁영화가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1979년의 <지옥의 묵시록>, 1986년의 <플래툰>, 1993년의 <쉰들러 리스트>,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은 전쟁영화의 고전이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던 영화들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그에 필적할 만한 전쟁영화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때 할리우드에서 전쟁영화는 메이저 장르였지만 지금은 변신로봇이나 만화 속 영웅들에 더 집중하고 있다. 트렌드가 바뀐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4년 강제규 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어서 우리도 전쟁영화를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위 한국형 전쟁영화라고 했는데 말이 한국형이지 사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실감나는 노르망디 전투장면에서 영감받은 티가 팍팍 나는 작품이었다. 어쨌든 그 영화는 한국 영화계에 유의미한 시도였고 흥행에서도 1천만 관객이 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여야 했다. 8년이나 지났고 트렌드가 바뀌었음에도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를 예전 방식으로 만들었고, 결국 자신이 그다지 진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마이웨이>의 홍보문구를 보면 실감나는 전쟁 장면에 대한 강조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8년 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다 봤다. 물론 기술적으로 더 발전했고 더 스케일이 커졌다. 하지만 영화가 더 큰 자동차를 만드는 산업은 아니지 않은가? 남들은 세련된 전기차를 만들고 있는데 홀로 옛날 가솔린 차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든다고 소비자들이 알아줄까? 결국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이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



4. 블록버스터에 대한 오해


마지막으로, <마이웨이>를 보고 있으면 어지럽다. 화면 전환은 3초를 채 못 넘기는 것 같고 카메라는 어찌나 흔들어대는지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물론 지루해하는 21세기 관객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너무 자주 흐름이 끊긴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에서는 이런 방식이 관객을 오히려 더 지루하게 만든다.


이렇게 빠른 화면 전환은 20세기말의 트렌드였다. 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나누어 찍고 이어붙이는 것을 세련됐다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핸드헬드 카메라를 도입한 1994년의 <스피드>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센세이셔널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강제규 감독의 출세작 <쉬리> 역시 그런 시도를 그대로 가져와서 한국영화에 안착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할리우드의 요즘 상업영화들을 보면 드라마와 액션 장면에서 화면을 전환하는 속도가 다르다. 오히려 '파운드 푸티지'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서 과도한 핸드헬드는 그런 영화들에서 더 깊이 연구되고 있다. 예컨대 <블레어위치>나 <크로니클>처럼 '발견된 비디오'를 그대로 담은 영화들이다.


<마이웨이>는 무조건 화면을 전환하고 본다. 초반 마라톤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왜 그렇게 화면이 자주 전환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호흡의 드라마를 끌고 가기 위해서라면 초반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야 했다. 하지만 흐름을 너무 끊어 정신없게 해버린 탓에 처음부터 숨이 가빠온다. 그래서 관객은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감독만 홀로 흥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이미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


<마이웨이>의 제작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노르망디의 한국인이라는 소재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정말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이 만든 영화는 소재의 참신함을 전혀 이용하지 못한 듯해 안타깝다. 강제규 감독은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할리우드 스타일을 한국영화에 접목시킨 것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소재에 대한 상상력은 부족해 보인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어야 했다. 예컨대, 사건을 시간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김준식이라는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거나 혹은 코엔 형제의 <허드서커 대리인>처럼 도대체 그가 왜 독일군복을 입고 있는지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파헤치는 영화였다면 훨씬 더 새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제작 규모가 작더라도 그 편이 더 의미있는 시도였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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