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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영화 '페르소나'는 아이유가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힘들었을 프로젝트다. 다른 영화에서 소비된 적 없고, 대중적으로 친근하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고, 그러면서도 연기력도 갖춘 배우만이 이런 프로젝트에 어울릴테니 말이다.


영화는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등 4명의 감독이 아이유(이지은)를 주인공으로 만든 네 편의 단편영화를 묶었다. 지난 2017년 JTBC에서 방영된 단편영화와 예능의 콜라보 '전체관람가'를 통해 단편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엿본 윤종신의 미스틱 스토리가 제작하고 넷플릭스가 투자했다.


'페르소나' 중 '러브세트'


그동안 감독들의 데뷔코스, 학생들의 습작으로만 여겨지던 단편영화는 '페르소나'를 통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지난 11일 공개된 영화에선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보인다.


우선 절반의 성공. '페르소나'는 개성 있는 감독들과 아이유라는 톱스타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았다. 장편영화와 달리 단편영화는 호흡이 짧고 기승전결 없이 곧바로 핵심에 집중해 감독의 성향과 스타일이 장편보다 훨씬 잘 드러나는 편인데 '페르소나' 속 네 개의 단편 역시 이런 장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이경미는 이경미하고 임필성은 임필성하고 전고운은 전고운하고 김종관은 김종관한다. '미쓰 홍당무' '마담 뺑덕' '소공녀' '더 테이블' 등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곧바로 스타일의 익숙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유는 감독들의 성향에 맞춰 영화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프로듀사'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나의 아저씨' 등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로서 입지를 다져온 아이유가 드라마보다 호흡이 느리고 장면의 세공력이 강조되는 영화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아이유의, 아이유를 위한 기획은 네 편의 단편영화가 아닌 한 편의 장편영화로 볼 땐 한계가 뚜렷하다. 네 편을 묶은 공통점은 한 명의 배우인데 그 한 명(아이유)의 팬이 아니라면 네 편의 다른 이야기가 서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상황이 어색하게 다가올 것이다. 즉, 관객은 영화가 계속되면서 조금 전에 본 아이유 캐릭터에서 빠져나와 다음 편의 아이유에게 몰입해야 하는데 이는 장편영화로서는 자기모순이다. 네 편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하나로 수렴하는 아이유의 성장 서사를 만들었다면 이런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영화는 아이유가 쌓아온 기존 이미지에 철저하게 기대고 있다. 아이유의 노랫말과 드라마 연기와 방송에서 보여준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영화의 재미 요소이자 존재 이유처럼 보인다. 제목인 '페르소나'는 감독의 페르소나가 된 아이유를 지칭하면서 동시에 아이유가 지난 2008년 데뷔한 이래 스스로 만들어온 엔터테이너로서 사회적 가면을 떠올리게 한다.


'페르소나' 중 '썩지 않고 아주 오래'


이경미 감독의 '러브세트'에서 아빠의 연인을 질투하는 딸은 'Zeze'로 성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아이유를 연상시키고,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고 아주 오래'에서 오픈된 남녀관계를 지향하는 팜므파탈은 '잼잼'에서 "알 만한 사람끼리 이 정도 거짓말엔 속아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라며 퉁명스럽게 내뱉던 모습을 떠오르게 하며,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에서 연인을 위로하는 대사는 '밤편지'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닮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아이유가 이전에 보여준 적 없는 어둡고 시니컬한 모습의 연기로 호평받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페르소나'의 아이유는 지나치게 익숙하다. 가사 속 이미지를 단편적으로 사용한 장면은 뮤직비디오의 노래 없는 버전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페르소나' 중 '키스가 죄'


그나마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는 네 편 중 유일하게 기존 아이유에게 없던 이미지를 만들어주려 한 작품이다. 감독은 "학창시절을 건너 뛴 아이유에게 또래들의 체육복을 입혀주고 싶었다"며 연출의도를 밝혔는데 그래서인지 네 편 중 가장 신선하다.


이 작품에서 아이유가 연기한 여고생 한나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빠에게 사소한 복수를 하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 또래 사이에서 가장 성숙하고 의리있는 친구, 그러면서도 장난끼 많은 여고생이 전 감독이 영화 속에 담은 아이유다.



그동안 옴니버스 영화들 중 한 배우의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대표적인 작품은 '인비테이션 투 더 댄스'(1956) 정도인데 이 작품은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였던 진 켈리 주연으로 세 가지 단편을 묶었다. 대사 없이 춤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로 진 켈리는 세 단편에서 각각 광대, 해병, 신드바드로 분해 춤을 췄다.


한국영화 중엔 ‘여배우는 오늘도’(2017)가 문소리를 주연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묶은 옴니버스식 구성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문소리가 맡은 배역은 사실상 하나였다는 점에서 ‘페르소나’와 다르다.


대부분의 옴니버스 영화들은 장소나 주제를 공유했다. 프랑스 파리에 사랑을 바친 '사랑해, 파리', 뉴욕을 배경으로 한 '뉴욕 스토리', 도쿄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이야기 '도쿄!', 호텔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 '포룸', 시간을 소재로 삼은 '텐 미니츠 첼로', 인권을 주제로 한 '여섯 개의 시선', 한중일 세 가지 공포 '쓰리, 몬스터', 거장들의 영화에 대한 헌사 '그들 각자의 영화관' 등이다.


'페르소나' 중 '밤을 걷다'


한 배우를 중심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가 많지 않은 이유는 이런 시도 자체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이 캐릭터에 녹아들기 전에 이미 배우의 자기장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해도 배우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관객은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한 명의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의식할 수밖에 없다. 관객을 작품으로부터 떨어뜨리는 소격효과를 일부러 노린 것이 아니라면 창작자 입장에선 장벽이다.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 이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와 플롯을 구성했어야 하는데 결과물은 여전히 이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페르소나'는 그동안 소외받아온 단편영화에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래와 방송을 통해 잘 알고 있던 아이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아이유 활용법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드문 시도이긴 하지만 기왕 아이유를 연결고리로 옴니버스 영화를 기획했다면, 주인공이 아이유여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했어야 하지 않을까.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5361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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