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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뜻하는 '어스(Us)'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경계'가 형성된다. 경계는 화자에 따라 다르다. 우리 나라라고 할 때 경계는 국경이고,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경계는 담장이며, 우리 가족이라고 할 때 경계는 핏줄 혹은 법적 구성원이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어스'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서부 산타크루즈 해변 근처에 사는 흑인 가족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가족, 그중 윌슨이라는 성을 쓰는 미국의 흑인 가족이다. 이 가족은 아빠, 엄마, 딸, 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날 밤 집앞에 다른 가족이 나타난다. 윌슨 가족은 이들을 보자마자 경계한다. 본능적으로 '우리'와 구분짓는다. 경찰에 신고하고 야구방망이를 찾는다. 이들이 이처럼 겁에 질려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때 '우리'는 확장하지 못하고 갇힌다. 그들이 집안으로 침입해 다가올수록 '우리'의 영역은 축소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벌어진다.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인 것이다. 단지 외모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서 관계와 성격, 취향까지 똑같다. 이제 우리와 똑같은 우리와 실제 우리를 구분짓는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가 그들이고,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독일 고딕 문학에서 처음 선보인 도플갱어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성에 숨겨진 악마성을 상정하고 있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악의 쌍둥이(evil twins)는 내가 드러내지 못한 악한 본성을 마구 표출했다. 그래서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그것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했다.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E.T.A 호프먼의 '악마의 영약',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중인격' 등 도플갱어를 소재로 삼은 소설들은 나와 그것이 힘을 겨루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전복시키는 이야기였다.


비단 고전소설뿐만 아니라 현대 영화에도 도플갱어는 자주 소재로 쓰인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도플갱어'(2003)에서 주인공 하야사키(야쿠쇼 코지)는 자신과 상반된 성격의 도플갱어에 점점 동화되어 간다. 그는 도플갱어를 통해 도둑질, 살인 등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다가 마침내 도플갱어를 죽여버리고 스스로 악인으로 거듭난다.


영화 '도플갱어'


지난 2월 20일 개봉한 한국영화 '사바하'에선 도플갱어가 종교적 예언과 결합한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가진 존재로 그려졌다. 이재인이 1인 2역한 '금화'와 악마성을 갖고 태어난 쌍둥이인 '그것'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 났으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도플갱어 서사는 인간의 감춰둔 본성(얼터 에고)과 연계돼 있어 그것과의 대결은 곧 나의 변화로 귀결된다. 나와 도플갱어의 경계가 모호한 틈을 타 전혀 다른 나로 탈바꿈하거나 그것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다. 하이드에게 지배당한 지킬박사도, 완벽한 도플갱어를 부러워한 '이중인격'의 골랴드킨도, '도플갱어'의 하야사키도, '사바하'의 금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어스'도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 빨간 옷을 입은 도플갱어 가족은 폭력적이어서 이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아들 제이슨의 도플갱어는 불장난에 중독된 나머지 화상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이들은 집 안으로 침입해 윌슨 가족을 공격하고 윌슨 가족은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여느 도플갱어 이야기가 그렇듯 세상에 같은 존재가 둘일 수 없어서 이 악몽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난다.


영화 '어스'


그런데 영화가 도플갱어 스토리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하세계를 보여줄 때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을 넘어 사회, 국가 등 더 큰 단위로 확장된다. 그들은 지하에서 '우리'의 행동을 똑같이 흉내내면서 살아가고 있다. 영혼 없이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유사 좀비처럼 보이는데 지하에 갇혀 나의 행동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다는 데서 공포심보다는 오히려 연민이 든다. 이들은 우리의 외양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다는 데서 복제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도플갱어와 달리 복제인간은 인간 대체라는 목적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더 슬픈 존재다. 지하세계에 수많은 토끼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에 갇힌 토끼들은 이곳이 자유의지가 실종된 곳임을 보여준다.



복제인간 서사는 한 개체의 각성으로 시작한다. '아일랜드' '네버 렛미고' '아이, 로봇' '프로메테우스' '엑스 마키나' 등을 떠올려 보면 된다. (복제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혹성탈출'도 비슷하다.) 각성한 복제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창조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세를 규합해 그들만의 세상을 건설하려 한다.


도플갱어와 복제인간의 차이점은 이들이 겨냥하는 대상에 있다. 도플갱어는 개인 속 타자화된 자신에 대한 내재된 공포를 건드리는 반면, 복제인간은 사회 속 자신을 타자화한다. 도플갱어 서사에서 '우리'는 경계가 좁은 반면, 복제인간 서사에서 '우리'는 경계가 넓다.


이 영화의 영리한 지점은 도플갱어와 복제인간 서사를 합쳤다는 데 있다. 그 사이에 조던 필 감독은 담고 싶은 메시지를 '우리'라는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그로 인해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가족, 사회, 인종, 국가 등 다양한 경계의 배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 '어스'


윌슨 가족은 TV를 통해 붉은 옷을 입은 도플갱어들이 그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한날 한시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플갱어와 복제인간 서사를 합친 영화는 이제 재난영화의 서사로 나아간다. 경찰, 미디어가 마비되며 도시가 무법지대로 변한 가운데 윌슨 가족은 멕시코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런데 영화는 무늬만 재난영화의 플롯을 따를뿐 장르적 쾌감을 선보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공포의 직접적인 대상인 윌슨 가족의 도플갱어들이 사라진 뒤 다른 이들의 도플갱어들은 위협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지상에서 살아남은 도플갱어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1986년 15분간 손을 잡는 것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캠페인이 직접적인 모티프로 제시된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붉은 옷을 통일해 입고 손 잡아 펼치는 거대한 띠는 많이 언급된 것처럼 미국 내 이민자에 대한 차별, 멕시코 장벽, 인종 갈등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로 읽힌다.



장관을 이루는 거대한 비언어 퍼포먼스를 통해 이들은 지하세계에서 소외받아온 그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다. 그런데 '우리'의 도플갱어인 이들의 행동은 결국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의 발현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 폭력적인 행동으로 다가올 땐 악의 쌍둥이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그들에겐 나름의 사연이 있었고, 그 사연의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우리 안에 내재된 차별의식이었다.


영화 '어스'


손을 맞잡은 채 산을 가로지를만큼 길게 늘어선 이들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차별의식이라는 우리 안의 경계를 허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각으로 보여준다. 마침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결정적인 논거를 반전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수많은 도플갱어들을 규합해 지상으로 이끈 최초의 각성자가 사실은 인간(루피타 뇽이 1인 2역한 애들레이드)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도플갱어는 인간으로 위장해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왔다. 결국 그녀와 도플갱어를 구분짓는 차이를 만든 것은 자라온 환경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결말을 통해 설득하고 있다.


어스 ★★★

이상한 나라에서 온 도플갱어와 복제인간. 개연성은 부족하지만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5231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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