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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큰 잡음 없이 마무리됐다. 1989년 이래 최초로 사회자 없이 진행된 시상식은 다소 밋밋했지만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의 멋진 ‘Shallow’ 공연,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과 연인 루시 보인턴의 뜨거운 키스, 여우주연상 올리비아 콜먼의 귀여운 수상소감 등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필자가 느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관전평을 세 가지 포인트로 정리했다.


'그린 북'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피터 패럴리 감독이 오스카 백스테이지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1. 오스카는 오스카를 선택했다


올해 가장 큰 이변은 '그린 북'의 작품상 수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라고 예측할 때 의외의 영화가 트로피를 가져갔다.


인종갈등 이슈라면 더 치열한 ‘블랙클랜스맨’이 있다. 반트럼피즘으로 이민자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면 ‘로마’가 최선의 선택이고, 작품의 심미성만 본다면 ‘더 페이버릿’의 손을 들어줄 만하다. 화제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골든글로브 수상작인 ‘보헤미안 랩소디’를 따라갈 수 없다. 위 영화들이 받았다면 미디어와 평자들은 그 의미를 한쪽으로 몰아가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린 북’은 애매하다. 반트럼프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첨예한 인종갈등을 담았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아카데미는 '화합'을 택했다는 식의 에두른 평가가 나온다.


'그린 북'은 누구나 부담없이 좋아할 만한 영화라는 점에서 어디서도 욕먹지 않을 가장 무난한 선택으로 보인다. 흑인과 백인이 인간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1989년 수상작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땐 흑인이 운전자였고 이번엔 백인이 운전자라는 점만 다르다.


‘그린 북’은 후보작 8편 중 가장 아카데미다운 영화다. 오스카가 91회를 맞을 때까지 견지해온 보수성을 유지하는 결정이다. 한 마디로 오스카는 오스카를 택했다.


'블랙클랜스맨'으로 각색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리 감독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2. 스파이크 리가 처음 무대에 올랐다


영화를 무기로 쓰는 몇 안 되는 현역 감독인 스파이크 리는 이날 프린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보라색 수트에 보라색 모자, 보라색 안경을 쓰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흑인 여성의 삶을 그린 '칼라 퍼플'(1985)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보라색은 권력을 드러내는 색이자 마이너리티의 존엄을 상징하는 색이다.


스파이크 리는 이날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똑바로 살아라’ ‘정글 피버’ ‘말콤 X’ 등 걸작이 있지만 당시 아카데미는 그를 외면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사뮤엘 L 잭슨과 뜨겁게 포옹하더니 곧 미리 준비해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의 삶을 통해 노예로 살아온 흑인의 역사를 언급하며 “2020년엔 투표를 잘 하자”고 외쳤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나온 것은 이때가 거의 유일했다.



스파이크 리는 시상식 마지막 순간에도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린 북’이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됐을 때 그는 화를 내며 나가려다가 조던 필 감독의 만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박수를 치는 대신 뒤돌아 앉았다. 나중에 그는 한 인터뷰에서 1989년 ‘똑바로 살아라’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 밀려 후보에도 못 오른 것과 ‘블랙클랜스맨’이 ‘그린 북’에 밀린 것이 동일선상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운전해 줄 때마다 내가 패배한다. 1989년에 나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후보에 오르긴 했다.”


‘그린 북’ 역시 인종 갈등 문제를 다룬 수작이지만 한편에선 백인의 일방적인 시각이 주입된 영화라는 비판도 있다. 각본을 쓴 닉 발레롱가는 트위터에서 무슬림 비하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필자 개인적으로 올해 후보작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영화는 '블랙클랜스맨'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에선 극장 개봉 없이 VOD로 직행했지만 꼭 재평가 받기를 바란다.


레이디 가가(왼쪽)와 브래들리 쿠퍼가 '스타 이즈 본'의 주제곡 'Shallow'를 함께 부르고 있다.


3. 시청률에 목맨 아카데미 안도의 한숨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시청자 수는 사상 최저 수준이던 지난해 2650만명보다 14.3% 늘어난 2960만명을 기록했다. 매년 하락하던 시청률이 반등한 것은 5년 만에 처음이다. 하지만 2년 연속 2천만명대 시청자 수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떼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아카데미 시상식 시청자 수가 2천만명대에 머문 것은 작년과 올해 두 차례에 불과하다. 작년 지미 키멜이 진행한 시상식이 워낙 관심도가 낮았기에 올해는 자연스럽게 반등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5년 전인 2014년 4370만명은 여전히 높은 고지처럼 보인다.


'보헤미안 랩소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라미 말렉이 연인 루시 보인턴과 키스하고 있다.

'더 페이버릿'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올리비아 콜먼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시상식 시청률 사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빚은 논란은 모두 시청률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3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제가상 후보작 축하공연을 5개에서 2개로 줄이려다가 다른 3개 작품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원상복귀시켰고, 촬영, 편집상 등 기술부문 시상식 때 광고를 내보내려다가 영화인들의 항의를 받고 철회했다. 압권은 9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기상’을 제정해 블록버스터 팬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으려다가 아카데미 권위가 손상된다는 비판에 없던 일로 한 것이다.


올해 시상식은 1989년 이후 처음으로 사회자 없이 진행돼 전체 시간이 3시간 21분으로 줄었다. 이는 근래 가장 짧은 시간이다. 진행 시간이 줄어든 것이 시청률 상승을 견인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카데미가 멕시코를 적극 껴안는 이유 중 하나도 시청률에 있다. 미국 내 라틴계 인구가 5600만명(2015년 미국 인구조사국 조사)으로 17%에 달할 정도로 급증하면서 히스패닉은 아카데미 시상식 시청률 사수의 한 축으로 급부상했다. 올해 시상식 무대에서는 유독 스페인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라틴계 시상자와 수상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감독상은 지난 6년 간 무려 다섯 차례나 멕시코 감독 세 명이 돌아가면서 가져갔고, 올해는 스페인어 발성의 멕시코 영화 ‘로마’가 작품상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년도 수상자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포옹하고 있다.


아카데미는 초조하다. 지난 10년 동안 시청률은 하락 추세에 있고 주관 방송사인 ABC는 광고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행사인 아카데미 시상식은 1990년대엔 슈퍼볼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이제 시청자 수 규모는 슈퍼볼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최근 시청률 하락은 비단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슈퍼볼, 그래미상 등 다른 블록버스터 이벤트들도 같은 이유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스트리밍 시대에 영상 쪼개보기가 일상이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올해 그래미에 이어 아카데미도 작년에 비해 시청률이 반등했지만 이 추세를 계속해서 이어가 역주행할 수 있을지, 이를 위해 아카데미는 내년엔 또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936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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