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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밴더미어 원작, 알렉스 갈란드 감독의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은 ‘엑스 마키나’의 감독의 신작으로 주목받았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형태, 또하나는 부부간의 소통입니다. 종의 이야기와 개인의 이야기를 섞었다는 점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잘된 이야기를 보면서 감탄하지만 때론 잘못된 예를 보면서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컨택트’에 비해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이 담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줄거리: 미국 해안지대의 한 국립공원. 이곳은 어떤 전자파도 통하지 않아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지역으로 엑스구역(Area X)이라 불립니다. 이곳에는 쉬머(Shimmer)라 불리는 기묘한 막이 형성돼 있는데 쉬머는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쉬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하는 비밀기관 ‘서던 리치’는 군사를 모아 탐사대를 파견했지만 살아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나(나탈리 포트만)도 남편 케인(오스카 아이작)이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돌아옵니다. 유일한 생존자인 것이죠. 하지만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레나는 자신이 직접 자원해 쉬머로 들어갑니다.



첫번째 생명의 형태. 엑스구역에서 생명은 한가지 형태가 아닙니다. 다양한 형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는 매순간 세포 분열로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매순간 다른 존재라고 말했는데요. 여기선 단지 인간이 인간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나의 유전체를 공유합니다.


레나는 생물학자입니다. 그녀는 쉬머에서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꽃, 나무, 악어, 사슴 등의 유전자는 달라야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쉬머의 힘이 이 체계를 흔들어 유전자를 하나로 통일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엑스구역에는 꽃뿔이 달린 사슴, 인간 모양을 한 나무, 인간 목소리를 내는 악어 등 듣도 보도 못한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엑스구역을 만든 힘은 외계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국립공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인간들만 몰려 사는 도시에서라면 종이 한정적이어서 의도를 드러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넓은 공원이기에 지구 상의 여러 종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엑스구역은 신비롭지만 사실 작가가 이런 설정을 한 의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역습을 경고한 것일 수도 있고, 인간도 결국 유전자 증식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의 하나라는 것을 설파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목처럼 결국 모든 것은 불타버려 소멸한다는 존재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부부 간의 소통. 레나는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우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겉보기에 부부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군인인 케인은 그동안 파키스탄 등에 파병 간 적 있었기에 레나는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수소문하다가 6개월 만에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1년 만에 돌아온 남편은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레나는 남편이 자살 미션에 가까운, 아무도 살아돌아온 적 없는 엑스구역에 왜 자발적으로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기한 심리학 박사 벤트레스는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자멸은 인간의 본성이에요. 완벽한 것을 깨뜨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게 인간이죠. 끔찍한 결말을 알면서도 굳이 뛰어든다거나, 갑자기 자해를 한다거가… 혹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유없이 파탄내기도 하죠.”


레나는 직장에서 만난 동료와 외도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이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기 때문에 남편이 상처 받아 떠난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쉬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점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DNA로 변형돼 굴절된 뒤 새롭게 재결합하는 쉬머 속에서 케인 역시 전혀 다른 존재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가장 친한 사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동안 공유한 관계, 기억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죠. 주변에 치매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더 와닿을 텐데요. 공유해온 것이 소멸해버린 관계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첫 번째 주제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 역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아쉬운 점입니다.



갈란드 감독은 전작 ‘엑스 마키나’에서도 모호한 전략을 택한 적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 에이바가 출현했지만 과연 그녀가 선인지 악인지 끝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영화의 모호함은 영화의 주제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하나의 정답을 제시했다면 그 영화가 그처럼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은 조금 더 모호함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 이야기의 메시지가 모두 모호하기에 잘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컨택트’와 비교해보면 아쉬운 점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컨택트’는 시간을 시계열이 아닌 통시적으로 보는 외계인의 언어를 통해 인생에 담긴 고통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메시지로 나아가는 영화였습니다.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언어학자 루이스는 미래가 고통으로 귀결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삶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영화 '컨택트(Arrival)'


이에 비해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은 재구성된 DNA가 레나의 부부관계에 어떤 의미인지, 인간의 소멸(자멸)과 인간관계 단절이 인과관계인지 단지 상관관계인지, 이 기막힌 모험을 통해 레나가 얻은 것은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객에게 최종 판단을 맡기는 모호함은 때론 여운을 남기지만 지나치면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감독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정리해주어야 합니다. 영화는 제목인 ‘소멸’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지만 소멸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PS) 밴더미어의 원작 소설은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영화는 이중 첫 번째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소설이 발표된 뒤 유사한 레퍼런스에 대한 지적이 있었는데요. 늪에 추락한 유성에서 전염병이 돈다는 스토리의 H.P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우주의 컬러'(1927)와 과학적 발견을 찾아 미스터리의 제한구역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의 보리스 &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로드사이드 피크닉'(1971)입니다. ‘로드사이드 피크닉’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걸작 영화 '스토커'(1979)로 만들어졌습니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

종의 소멸과 관계의 소멸. 두 이야기가 연결되지 못하는 지나친 모호함.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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