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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완승이다. 설연휴 극장가는 ‘극한직업’이 장악했다. 개봉 15일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질주하고 있다. 하루에 무려 110만명을 극장으로 불러냈다. 지금까지 이런 흥행이 없지는 않았다. ‘극한직업’이 관객을 모으는 속도는 ‘명량’ ‘신과 함께 - 인과 연’에 이어 역대 세 번째다. 하지만 관객 수 증가량이 좀처럼 줄지 않고 있어 최종 스코어가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비슷한 경찰 소재 영화인 경쟁작 ‘뺑반’은 개봉 8일차인 6일 관객 수 145만명으로 손익분기점 400만명에 한참 못 미친다. 오로지 ‘극한직업’만 무한흥행하고 있다.



‘극한직업’의 스크린 수는 무려 2002개에 달한다(4일 기준). 예전 같으면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나왔겠으나 이번엔 잠잠하다. 그동안 위축돼 있던 한국영화가 모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했기에 영화계에서도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신과 함께’를 제작한 리얼라이즈 원동연 대표는 “최근 한국영화 대작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해 영화계 전반에 위기론이 팽배해지고 있던 때에 ‘극한직업’의 흥행은 영화산업이 여전히 섹시하다는 싸인을 주는 거라 반갑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해 설날에만 해도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에 밀려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박스오피스 1위 ‘블랙 팬서’가 470만명을 동원할 때 2위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은 240만명을 동원해 손익분기점(300만명)도 넘지 못했다.


지난 추석 시즌에는 한국영화 대작 4편(물괴, 안시성, 명당, 협상)이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하는 바람에 누구도 웃지 못했다. 한국영화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네 편 중 어느 한 편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소위 ‘대작’이 더 이상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이후 이어진 ‘서치’ ‘완벽한 타인’ ‘보헤미안 랩소디’ ‘국가부도의 날’ 등 비교적 작은 영화들의 흥행은 기획의 승리였다. 대중은 어깨에 힘준 뻔한 대작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거나 진정성 있는 작품을 원하고 있었다.


지난 12월 연말 특수를 노리고 개봉한 대작들인 ‘마약왕’ ‘스윙키즈’ ‘PMC: 더 벙커’가 모두 실패한 것은 대중의 입맛이 변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또다른 사례였다.



‘극한직업’의 흥행 요인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가벼운 코미디라는 점을 꼽지만, 단순히 영화가 무겁고 가볍고를 떠나서 성공한 작은 규모의 영화들과 실패한 대작 영화들의 차이점은 ‘공감력’에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 중 ‘조선명탐정’ ‘스윙키즈’ 등은 충분히 가벼운 영화들이었다. 특히 음악과 춤이 장점인 스윙키즈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음악영화 열풍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윙키즈에는 공감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부족했다. 단적으로 스윙키즈엔 프레디 머큐리의 뜨거운 삶이 없었다.


개봉 전 ‘극한직업’이 이 정도까지 흥행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코미디 장르는 그동안 한계가 뚜렷했고, 주연배우인 류승룡은 최근 4년 간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이하늬는 ‘부라더’로 이제 막 코미디 연기의 첫발을 뗀 참이었고, 진선규는 ‘범죄도시’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 그의 코믹 캐릭터를 받아들이기엔 진입장벽이 있었다. 이병헌 감독의 ‘말맛’ 코미디는 재기발랄하지만 최근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관객은 ‘극한직업’의 유머에 단숨에 적응했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설정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은 잘릴 위기에 놓인 만년 경찰반장이 동료들과 함께 치킨집 운영이라는 투잡을 하며 범인을 잡는 이야기다. 단순히 경찰이 범인 잡는 이야기에 ‘아재개그’식 코미디만 삽입했다면 지금처럼 큰 인기를 얻기는 힘들었을지 모른다. 영화에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회사원, 치킨집 대박을 꿈꾸며 창업 전선에 뛰어든 소상공인 등 대중이 공감할 요소가 스토리의 뼈대를 이루고 있고, 곳곳에 근로시간, 프랜차이즈 본사 갑질 등 현실성 있는 대사를 유머러스하게 삽입해 이것이 막연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풍자임을 주지시킨다. 그 결과 ‘극한직업’은 지난 1년간 나온 어떤 한국 상업영화보다 지금 내 삶과 피부에 와닿는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 상업영화의 미덕인 가벼움을 잃지 않아 웃으면서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탄생했다.



영화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를 기획할 때는 대중의 기호가 이렇게 바뀔지 예측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대중은 마침 이런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 년간 반복된 정치영화, 역사영화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좀더 내 삶에 와닿는 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영화에는 ‘공조’ ‘베테랑’ 등 흥행 경찰영화의 컨벤션이 녹아 있는데 이는 흥행 부담감의 반영일 것이다. 이병헌 감독은 전작 ‘바람 바람 바람’의 흥행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참이었고, 그의 장기인 ‘말맛’ 뿐만 아니라 액션과 친숙함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참고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극한직업’은 '미숙한 형사가 치킨집으로 내박낸다'는 엉뚱한 설정만으로 이미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 ‘극한직업’의 네티즌 후기에는 “모처럼 스트레스 풀고 나왔다”는 글이 다수를 이룬다. 웃을 준비를 하고 들어가 실컷 웃고 나오는데 그 웃음은 공감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현실에서 받는 각종 스트레스가 영화 속에 코믹하게 담겨 있고 이를 날려버릴 유머러스한 설정들이 영화 속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영화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지점이다. 지금 극장가를 영화 한 편이 홀로 장악하고 있는 데서 보듯 ‘극한직업’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754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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