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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우개로 변하는 남자

코끼리 머리를 가진 남자

붉은 커튼을 친 방에서 춤추는 난쟁이

바닥에 귀가 떨어져 있는 이상한 마을

인공호흡기를 단 성도착자

엄마를 찾으며 섹스하다가 아빠가 무섭다며 도망가는 남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가도 가도 똑같은 곳이 반복되는 암흑의 고속도로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정부이자 누군가의 상상 속 여인인 여자

감옥에 갇힌 뒤 갑자기 전혀 다른 젊은 남자로 변해버린 남자

꿈에서 본 모습이 똑같이 재현되는 식당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세계를 설명하는 세 단어를 꼽으라면 개미, 붉은 커튼, 변형이다.


개미는 ‘평범함 속의 이상함’을 상징한다. 그는 개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언제나 붉은 개미들이 깔려 있다.”


블루 벨벳(1986)


영화 ‘블루 벨벳’의 첫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제프리(카일 맥라클란)의 아버지는 잔디밭에서 물을 주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데 이때 카메라는 아버지의 머리를 훑고 지나가다가 잔디밭 안의 벌레들을 보여준다. 푸른 잔디밭처럼 평온해 보이는 마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실은 벌레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개미 마니아다. 그는 어린 시절 개미를 연구했고 해부했고 해부한 것을 전시했다. 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추악한 면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은 보이는 것 뒤에 추한 것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트윈 픽스(1990)


두 번째 단어인 붉은 커튼은 ‘내면 속 잠재의식’을 상징한다. 드라마 ‘트윈 픽스’에서 쿠퍼 형사가 보는 환영에선 붉은 커튼으로 막힌 방에서 난쟁이가 춤을 춘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붉은 커튼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에세이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에 이렇게 썼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커튼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마 커튼은 붉은색이리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로스트 하이웨이(1997)


세 번째 단어인 변형은 이상한 잠재의식의 발현으로 ‘부조리함’을 상징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는 것처럼, ‘이레이저헤드’의 헨리 스펜서(잭 낸스)의 머리는 고무지우개 원료로 변하고, ‘로스트 하이웨이’의 프레드 매디슨(빌 풀맨)은 갑자기 젊은 피트 데이튼(발타자 게티)으로 변한다. 린치는 부조리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조리함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무지와 싸우는 과정 속에는 유머가 있다. 반복해서 벽을 향해 달리다가 피를 쏟는 남자를 봤다면, 잠시 후 당신은 그 행위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웃게 될 것이다.”



린치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플롯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생의 부조리함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지만 결국 한 곳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허무함이고, 이것이 뫼비우스의 띠 플롯을 통해 드러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플롯은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을 들추면서 베티와 리타 혹은 이들의 잠재의식 속 변형인 다이앤과 카밀라의 애증이 불러오는 파국을 강조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린치는 농림부 소속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과학자인 아버지와 언어교사인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뭘 하든 내버려두는 방임주의자였는데 10대 때 그는 직접 만든 폭발물을 중학교 수영장에서 터뜨려 체포될 정도로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건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린치는 화가가 되고 싶어 보스턴 미술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로 진학했다. 필라델피아의 우범지대에 살면서 그는 끔찍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이때의 기억이 향후 그의 영화 속 영감으로 이어졌다. 차를 도둑맞고 창문으로 총알이 날아오는가 하면 총에 맞은 아이의 시신이 5일 동안이나 길거리에 방치돼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필라델피아를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난 어느새 어둠 속으로 떠나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이미지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구현할 가능성을 찾았고, 미술 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 졸업 후 24세의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AFI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운다. 1972년 AFI의 졸업작품으로 ‘이레이저헤드’를 기획했고 이 작품은 무려 5년 만에 완성돼 세상에 나왔다.


이레이저헤드(1977)


여자친구가 낳은 기형아의 울음소리에 시달리다가 결국 그 아기를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머리가 지우개 공장의 원료가 되어버린 남자 이야기인 ‘이레이저헤드’(1977)는 평단의 혹평에 시달렸지만 그로테스크한 매력에 빠진 마니아를 양산했고, 컬트영화로 명성을 얻었다.


린치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을 간파한 프로듀서 조너선 생어는 유명 제작자 멜 브룩스에게 린치를 소개시켜 주었고, 20세기폭스 시사실에서 ‘이레이저헤드’를 본 브룩스는 너무 마음에 들어한 나머지 곧바로 린치에게 '엘리펀트 맨'의 연출을 맡겼다.


엘리펀트 맨(1980)


코끼리를 닮은 외모로 태어나 서커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19세기 존 메릭의 감동적인 이야기인 ‘엘리펀트 맨’(1980)은 상업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미 영화상 8개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성과를 냈지만 사실 린치의 대표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만의 세 가지 특징이 아직 발현되기 전 지극히 심심한 내용과 형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오스카 후보에 오를 만큼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기본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계기가 됐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영화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프랭크 허버트의 걸작 SF ‘사구’의 감독으로 린치를 점찍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린치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사구’(1984)는 린치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괴작으로 남았다. 로렌티스는 린치의 다음 영화 제작비로 6만 달러를 지원하면서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린치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만들고 싶어했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블루 벨벳’의 시나리오를 썼다.


블루 벨벳(1986)


평범해 보이는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선명하고 강렬한 스타일로 완성한 ‘블루 벨벳’(1986)은 린치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IFTA)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캐나다 국경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FBI 요원을 주인공으로 한 TV시리즈 ‘트윈 픽스’(1990)로 호평 받고, 대중적인 문법의 로맨틱 로드무비 ‘광란의 사랑’(1990)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린치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트윈픽스’는 2017년 시즌3까지 이어졌고, 린치는 드라마에 담지 못한 전사를 떼어내 1992년 영화 버전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특히 시즌1 에피소드3에선 린치 영화 특유의 붉은 커튼의 방이 처음 등장해 ‘린치 월드’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광란의 사랑(1990)


‘트윈 픽스’의 열광 이후 린치는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계속해서 밀고 나아갔다. ‘로스트 하이웨이’(1997)가 린치 월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는 린치 월드가 추상화로 나아가는 시발점이고, ‘인랜드 엠파이어’(2006)는 추상성이 강조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진 린치 월드다.


특히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국 BBC,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 미국 ‘필름 코멘트’ 등이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에서 1위를 차지할 만큼 독창적인 작품성을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로스트 하이웨이(1997)

인랜드 엠파이어(2006)


이후 린치는 영화 감독이 아닌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뮤지션으로 두 개의 솔로 앨범을 냈고, 다른 영화들에 사운드 디자이너로 참여했는가 하면, 세 권의 책을 썼고, 화가,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뮤직비디오와 디오르 광고를 만들었고, 커피 마니아로서 유기농 원두커피를 출시했으며, 영화 제작 만큼이나 심취한 명상 수련을 발전시켜 명상 재단을 설립해 홈리스와 난민을 도우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David Lynch 1946년생 (73세)

영화감독, 프로듀서, 작가, 작곡가, 화가, 사진가, 사운드 디자이너, 명상가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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