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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들은 언제나 주목받는 반면, 작은 영화들은 개봉한 줄도 모른 채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봉 주기가 짧아질수록 작은 영화들을 미리 챙기지 않으면 좀처럼 다시 보기 힘들 때가 많다. 연말은 한 해를 돌아보기 좋은 시간이다. 올해 대작들의 틈바구니에서 묻히기 아쉬운 작은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올해 가장 사랑스런 여행 영화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6월 14일 개봉. 관객 3만392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JR이 누벨바그 시대 노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함께 대형 사진 인화기를 실은 포트트럭을 타고 프랑스 구석구석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평소 잊고 있던 얼굴을 선물하는 것. 공장 인부들 수십 명의 얼굴이 삭막한 시멘트 벽에 붙자 평범하고 지루하던 그들의 일상에 웃음꽃이 핀다. 폐쇄된 탄광 마을을 홀로 지키며 살아가는 할머니는 집 앞에 내붙은 커다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식당 여성 종업원이 우산을 든 모습이 벽 전체에 인쇄되자 아이들은 엄마 얼굴에 환호한다. 우편배달부가 배달할 주소를 확인하는 모습을 그린 벽, 항만 노동자 대신 그들의 아내들을 사진 찍어 컨테이너 여러 개에 붙여 만든 작품도 있다. 55살 나이 차이가 나는 JR과 바르다는 때론 진지하게, 때론 장난기 가득한 아이의 표정으로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해 준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들이 남긴 사진이 아직 거기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북유럽 감성 신비로운 초능력 영화 - 델마

(8월 15일 개봉. 관객 7072명)


노르웨이에서 온 이 감성적인 영화의 타이틀롤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소녀 델마다. 그녀의 능력은 마음먹은 대로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물 속에 가둬 죽게 할 수도 있다. 사실 그녀는 뇌전증 환자다. 대학 신입생인 그녀는 수업 중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다른 학생들을 놀라게 한다. 어느 날 아냐라는 친구를 만나고, 아냐를 통해 델마는 숨겨진 능력을 알게 된다. 초능력을 제어할 방법을 찾는 여느 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델마는 오히려 괴로워한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로운 아냐와 어울리면서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는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은 자꾸만 가족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지만 조금씩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연출력이 탁월한 영화다.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난해해지지만 장면마다 상징이 담겨 있어 해석하는 재미가 있다.



일본에서 온 기발한 SF 영화 - 산책하는 침략자

(8월 16일 개봉. 관객 990명)


행방불명된 남편이 돌아오더니 갑자기 자신은 지구를 침략하러 온 외계인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당황스럽지만 남편은 더 이상 예전의 남편이 아니다. 그는 매일 어딘가로 산책을 나가고 마을에선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외계인의 인간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인류를 정복하는 방식은 인간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개념을 떠올리고 있을 때 머리에 가볍게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 개념을 빼앗아 올 수 있다. 그렇게 ‘가족’, ‘소유’, ‘일’, ‘자신’ 등 인류의 유산인 개념들이 사라져간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머리가 텅 빈 상태가 되고, 외계인의 조종을 받아 다른 인간을 공격한다. 영화는 개념 최후의 보루인 ‘사랑’을 놓고 외계인과 인간의 마지막 승부를 향해 달려간다. SF, 스릴러, 액션, 코미디, 로맨스 등 온갖 장르가 범벅돼 있는 이 영화는 상상력만 있으면 적은 제작비로도 기발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괴한 스토리의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치고는 꽤 낭만적인 편이다.




3040 여성에게 선물 같은 영화 - 툴리

(11월 22일 개봉. 관객 3만7175명)


30대 후반의 마를로는 세 아이를 키우느라 제정신이 아니다. 첫째는 덤벙거리고, 둘째는 남들과 달라 학교에서 쫓겨나고, 셋째는 밤낮없이 울어댄다. 몸은 불어서 젊은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성격은 괴팍해져만 간다. 남편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진다. 친오빠는 마를로의 일거리를 덜어주기 위해 보모를 고용해주겠다고 한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계속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렇게 툴리가 찾아온다. 20대의 젊은 보모 툴리는 마를로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툴리가 애정을 듬뿍 담아 아이들을 돌보자 아이들이 달라진다. 그녀는 마를로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준다. 올해 한국에서 제목에 ‘마흔’이 들어간 책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마를로는 마흔을 앞둔 이들을 대변하는 듯한 캐릭터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어른이지만 속은 여전히 불안하고, 새로움에 도전하기엔 겁이 많다. 영화는 그녀에게 툴리라는 선물을 보내 그녀를 위로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아토믹 블론드’의 액션 전사 샤를리즈 테론이 무려 22kg의 살을 찌우고 퍼질러지는 과감한 연기변신을 한 영화기도 하다.



미래가 불안한 20대가 공감할 영화 - 수성못

(4월 19일 개봉. 관객 3802명)


대구 수성못 오리배 매표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희정은 손님이 없을 때 틈틈이 편입시험 공부를 하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청년이다. 어느날 한 중년 남자가 수성못에서 실종되고 희정은 자신이 구명조끼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낙담한다. 밤중에 수성못을 찾아가 몰래 구명조끼를 물 속에 빠뜨려 놓고 오는데, 한 남자가 그 장면을 촬영했다며 희정에게 자신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협박해온다. 이제 희정은 영목이라는 남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런데 영목에게도 자살에 세 번 실패할 만큼 사연이 있다. 수성못에서 평온해 보이는 오리가 실은 발을 열심히 구르고 있는 것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20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무거운 소재지만 가볍고 위트 있게 그려내 웃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 매년 뛰어난 독립영화를 내놓고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유지영 감독 졸업작품이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345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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