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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추위 사이로 언뜻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 겨우내 얼어붙었던 가슴을 녹일 사랑 이야기가 스크린에 찾아왔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15년 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린 ‘콜드 워’, 일본 소녀의 짝사랑 성장담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이 호평 속에 관객을 맞고 있다. 애틋하거나 혹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콜드 워 - 냉전시대 전쟁같은 사랑


“하루만 더 있게 해줘요. 내 인생의 여자를 만나야 해요.”


빅토르(토마스 콧)는 자신을 추방하려는 비밀경찰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냉전시대는 빅토르의 사랑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상을 의심받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빅토르는 결국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빅토르가 인생의 여인이라 부르는 줄라(요안나 쿨릭) 역시 시대의 피해자인 것은 마찬가지다. 비극의 가정사를 지닌 그녀는 빅토르가 이끄는 마주르카 합창단에 발탁되며 주목 받는 가수로 성장하지만 운명이라 믿었던 빅토르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간다.



영화는 1949년부터 1964년까지 폴란드의 시골마을에서 시작해 베를린, 파리, 유고슬라비아, 바르샤바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빅토르와 줄라의 행각을 좇는다. 4:3 비율의 좁은 화각에 담긴 흑백 화면과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냉전시대의 답답함을 상징하는 듯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들의 절박함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영화는 생략이 많아 행간을 읽어야 하는 단편소설처럼 행동과 행동 사이를 건너 뛰어 관객으로 하여금 무슨 일이 있었을지 유추하게 한다.


영화에 또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음악이다. 다소 건조한 톤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감정 표출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는데 격정적이어야 할 감정선을 음악이 대신 표현해준다. 초기 폴란드 마주르카 악단의 음악은 순수함 그 자체였으나 곧 스탈린을 칭송하는 정치 선전 도구로 쓰이더니 프랑스로 도피 이후에는 샹송, 재즈 등과 결합하며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은 겉보기에만 그럴 듯한 것이어서 줄라는 사랑이 어긋나자 노래할 의욕마저 잃어버린다.



88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극장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영화다. 사상을 통제하는 냉전시대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인지 혹은 냉전시대였기에 이들이 이토록 우연이 반복되는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빅토르와 줄라가 최후의 사랑을 확인하는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겨 엔드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201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이다’로 주목 받은 폴란드의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이 부모의 파란만장한 연애담에서 영감 받아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작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있다.


콜드 워 ★★★★

시대가 갈라놓아도 헤어질 수 없는 사랑. 좁은 화각이 만들어내는 깊은 여운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 일본 소녀의 짝사랑 성장담


“다시 생각해봐도 전 점장님을 정말 좋아해요.”


17살 소녀 타치바나 아키라(고마츠 나나)는 비가 퍼붓는 날 45세의 이혼남 콘도 마사미(오오이즈미 요)의 집을 막무가내로 찾아가 이렇게 고백한다.


육상 기대주였다가 아킬레스 건을 다쳐 하루 아침에 꿈을 잃어버린 타치바나는 콘도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정한 콘도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단거리 주자였던 타치바나는 사랑에서도 돌아가는 법이 없어서 혼자서 끙끙 앓다가 직진 고백을 해버린다. 소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난감한 콘도는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그동안 포기하고 있던 육상의 꿈을 되찾아주려 한다.



제목처럼 영화에선 여러 번 비가 온다. 비 오는 날 감정이 요동치는 사건이 벌어지고, 비가 갠 뒤엔 인물들이 한뼘 더 성숙해져 있다.



영화는 일본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된 마유즈키 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중년 남자를 향한 소녀의 아슬아슬한 짝사랑이라는 소재는 다소 선정적으로 보이지만, 뜯어 보면 비온 뒤 맑은 하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성장담이다. 비단 17세 소녀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45세 점장 역시 세월 속에 방치해 놓고 있던 꿈을 재발견한다는 점에서 처음의 모습과 달라져 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처럼 관객을 윤리적인 시험에 들지 않게 하면서 쉼표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두 사람을 응원하게 만드는 데 있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으로 한국에서 소확행 팬을 확보한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작품이다. 원작 만화 캐릭터와 출연 배우들의 싱크로율이 높아서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

반짝반짝 빛나는 성장담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811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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