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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요원. 신원을 숨긴 채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스파이를 일컫는 단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흑색요원으로 활약했던 암호명 '흑금성' 박채서 씨(64)는 기자와 인터뷰가 예정된 지난 10일 아래위 백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날은 그의 이야기를 그린 대작영화 '공작'이 개봉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이루리 커뮤니케이션 대표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다. 그는 영화의 흥행 상황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며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공작'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차기작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겠다는 듯 그가 입고 온 흰옷은 흑색요원 활약상을 그린 영화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20년 전 신원이 폭로되며 한국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그가 20년 만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는 영화가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박씨는 오랜 군 생활과 이중스파이 생활이 몸에 배서인지 단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신중한 모습이었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전 국가안전기획부 흑색요원 `흑금성` 박채서 씨.


Q. 영화를 어떻게 봤나?


A. 사실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걱정이 많았다. 감독이나 배우가 전혀 접해보지 않은 분야잖나. 그런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



Q. 영화화 제의를 언제 받았나?


A.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다. 아내와 큰딸이 면회 와서 말해줬다. 그전에도 대여섯 건 제안이 있었는데 그땐 내 이름이 다시 회자되는 게 싫어 거절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에서 (영화 배급사인) CJ 이미경 부회장이 외유 나갈 정도로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한 제작사 한재덕 대표와 윤종빈 감독의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영화 '공작'에서 흑금성을 연기한 황정민 배우(왼쪽)와 실제 흑금성 박채서 씨. / 사진제공=박채서


Q. 영화에서 황정민 배우가 흑금성을 연기했다.


A. 노력 많이 한 것을 알고 있고 그의 연기에 만족한다. 촬영 전에 한 번 만났다. 역할에 충실하려고 엄청 공부를 했더라. 그때 내 경험담을 많이 들려줬다. 


Q. 영화와 실제 벌어졌던 일이 비슷한가?


A.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이다. 신원이 폭로될 때 북한에 없었다는 것만 다르다. 물론 실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추가로 집어넣거나 뺀 것들은 있다. 아마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을 들락날락 한다는 것은 사실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기록할 수 없으니 모든 걸 기억해야 하는데 머리엔 한계가 있지 않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10일이 한계다. 그래서 북한을 갈 때는 체류기간 10일을 넘긴 적이 없다.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압록강을 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그제서야 안심이 됐다.


육군 대위 시절의 박채서 씨. / 사진제공=이룸나무


Q. 안기부 흑색요원 제안을 받은 건 언제인가?


A. 1991년 육군대학 재학 때다.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생활 하던 중 운 좋게 육군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선배들을 보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육군3사 출신들은 육사 출신에 밀려서 진급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순진하게도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1986년부터 육군3사 출신은 대령 진급이 전혀 안 됐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허무하더라. 그때 안기부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내 역량이 다른 분야에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도전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Q. 영화 속 신용불량자가 되는 과정을 실제로도 겪었나?


A. 그 과정 자체가 공작 기법이다. 보안 문제가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달라. '위장포섭' 과정으로 상대가 내 뒷조사할 것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놓고 전과기록도 만들어 둔다. 흑색요원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다. 


1995년 방북 당시 흑금성 박채서 씨(왼쪽)와 보위부 연락책 리철 참사. / 사진제공=이룸나무


Q. 리철(영화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의 실제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A. 핸섬하고 지적이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사회에 물들지 않은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인상이 참 좋았다. 리철은 북한의 몇 안 되는 자본주의 전공자다. 그 사람의 박사논문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다. 남한을 잘 알고 있는 거다. 여러 면에서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그 전에는 전부 군인들이 나왔다. 내가 중령 진급 앞두고 전역했으니 그 쪽에서도 중좌를 보냈다. 하지만 대화가 잘 안 되더라. 그때 북쪽에서 궁여지책으로 내세운 사람이 리철이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됐다. 


리철은 1954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라서 쉽게 친구가 됐다. '리상', '박상'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일본어를 전공했는데 그 친구도 해외투자의 심의처장으로 일본 사람을 많이 상대해서 공통점이 많았다. 리철은 아들 둘이고 나는 딸만 둘이다. 나중에 사돈 맺자고 농담도 했다. 북한에서는 원래 베이징에 나오면 3년 정도 근무하고 돌아가는데 그는 오랫동안 했다. 아마 북한에서 나와의 관계를 배려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Q. 지금도 리철과 연락하나?


A. 2010년 이후로는 단절됐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해 5월 5일 김정일 위원장이 방중했을 때다. 수행원으로 왔길래 후진타오와 정상회담한 날 밤에 북측 인사들과 함께 만났다.



흑금성 박채서 씨(왼쪽)와 보위부 연락책 리철 참사. / 사진제공=이룸나무


Q. 남북합작 광고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북한에 침투했다. 김정일을 만난 상황을 설명해 달라.


A. 1997년 6월이었다. 평양 고려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 죽은 지 얼마 안돼 내부적으로 권력암투가 심할 때였다. 김정일은 밤에 업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다. 저녁 9시 30분쯤 리철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샤워하고 정장 입고 대기하라는 거다. 그때 뭔가 감이 왔다. 벤츠를 타고 모처로 이동하니 거기 김정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정도 짧은 만남이었다. 특별한 말이 오간 것은 아니다. 이미 나에 대한 신원보고는 다 올라갔기에 만남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북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당시 김정일의 관심사는 남한의 1997년 대선과 골동품 판매였다. 여기에 나를 활용하려고 했다. 김정일을 만난 이후 북한 고위인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Q. 영화에서처럼 그 자리에 리철이 있었나?


A. 리철은 민간인이어서 그 자리에 못 온다. 그는 북한 군부와 만날 때 껄끄러운 과정을 중간에서 거르는 친구다. 김명수, 김영룡 같은 국가안전보위부 실세들과 중요한 회의를 할 때 리철은 참석하지 못한다.


Q. 영화 속에서 흑금성은 몰래 녹음한다. 김정일을 만날 때도 녹음했나?


A. 최초의 공작원이 첩보를 취득해 가져오면 안기부 심사관들이 심사한다. 첩보가 효용가치가 있는지 확인한다. 그런데 그 첩보의 소스는 공작원의 입밖에 없다. 증거가 필요하다.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기 위해 나는 자주 녹음했다. 김정일 만날 때도 녹음했다. 김용순, 장성택, 김영룡, 안병수, 전금철, 강덕순과의 대화 녹음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소형 녹음기를 발목에 붙이고 간 건 아니다. 그건 영화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이다. 그렇게 녹음기에서 철컥 하는 소리 나면 큰일 난다. 그렇게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훨씬 세밀한 장비를 썼다.


Q. 녹음한 파일은 지금 어디에 있나?


A. 1998년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제출하고 복사본은 보관하고 있다. 당시 이중스파이 신분이 폭로됐을 때 만약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이 녹음테이프들이 한국과 일본의 언론사 다섯 곳으로 보내지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해외에 이 테이프들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흑금성 박채서 씨는 고려항공을 타고 자주 평양을 오갔다. / 사진제공=이룸나무


Q.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도와 북풍 공작을 막았다. 당시 실제로 북한에 어떤 말을 했나?


A. 당시 북한은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김대중이 국제적으로 명망 있고 상대하기 너무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것 등이 이유였다. 그들은 당시 이인제를 밀고 있었다. 나는 말이 통할 만한 젊은 엘리트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판문점에서 총을 쏴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다. 그걸 대비해라. 누군가 김정일에게 잘못된 보고를 하고 있다. 만약 김대중이 당선돼 당신들이 반대한 것을 알면 역효과가 날 거다. 그리고 김정일은 이에 대해 대규모 문책을 할 거다. 모험을 해봐라. 비즈니스에는 모험이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말했더니 이게 통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거 막판 판문점 총격은 (이회창 후보측과의 거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후보가 39만표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겼는데 만약 북풍을 막지 못했다면 선거 결과는 뒤집어졌을 수 있다.


Q. 당시 흑금성은 김대중 정권 탄생의 숨은 공신으로 회자됐다.


A. 그때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은 이인제를 밀었고, 안기부는 이회창, 나는 김대중을 도왔다. 안기부가 대통령의 의지와 달리 이회창 쪽에 선 것은, 원장 한 사람의 의지라기보다는, 내 판단에는 한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Q. 거대한 힘이라면?


A.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반도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을 사람이 누굴까?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 하나회 숙청은 사조직 해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바로 이어진 것이 율곡비리였다. 방산 비리는 이후로도 없어지지 않았다. 방산 거래에 관계된 커넥션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1997년 개성을 방문해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중인 박채서 씨 / 사진제공=이룸나무


Q. 김당 기자가 집필한 책 '공작'(이룸나무 펴냄)에서 1997년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피살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취지로 언급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소행인가?


A. 누구의 소행이냐는 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몇 가지 내가 겪은 정황을 밝히려고 한다. 2010년 6월 1일 새벽 6시 15분 긴급체포돼서 국정원 조사실로 압송됐을 때 수사관의 첫 말이 "1997년 이한영 죽인 권총을 일주일 전 북한산 소나무 밑에서 발견했다"였다.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아마도 그 수사관은 나를 체포하기 전 내 공작기록을 비밀해제하고 읽어봤던 듯하다. 내 임무 중에 1997년 2월 25일 이한영 피살 당시 북한 반응을 살피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이한영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김정일의 전 부인) 성혜림의 조카더라. 당시 북한 인사를 만나서 왜 남한 도심 한복판에서 이상한 짓 벌이냐고 따졌더니 그쪽에서 오히려 안기부에 물어보라고 하더라. 자기들이 보복살해하면 훨씬 더 잔인한 방식으로 하지 총을 쏘지는 않는다면서. 실제로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최덕근 영사(안기부 백색요원)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는데 그건 당시 그들이 인정했다. 최 영사가 끈질기게 북한과 러시아의 마약거래를 파헤치니까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영은 정치적 이용이라고 하더라. 



Q. 정권교체 후 1998년 안기부가 조직 보호를 위해 흑색요원을 폭로하는 문건(이대성 파일)을 만들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며 신원이 탄로났다. 이후 어떻게 지냈나?


A. 안기부에서 퇴직하면서 퇴직금 3억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주식에 투자했는데 운 좋게도 꽤 돈을 벌었다. 또 주변에서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줬다. 중학교 교사이던 아내가 퇴직하며 받은 퇴직금도 있었다. 두 딸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골프를 워낙 좋아해서 중국에서 골프로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다. 중국 사람들이 권유해서 컨설팅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한국 유학생과 비즈니스 관계자들을 중국에 연결시켜주는 회사였다. 조선일보가 중국에서 주최한 골프대회를 주선한 적도 있다. 


2004~2005년 박채서 씨는 조명애와 함께 남남북녀, 애니콜 광고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 사진제공=이룸나무


Q. 노무현 정부에선 대북 비선으로 활약했다.


A. 노무현 정부 초기 남북관계가 경색된 적이 있다. 그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이징에서 특사회담이 열려 가봤더니 북쪽에서 먼저 분위기 반전을 제안하더라. 그런데 갑자기 평화무드로 바꾸는 것은 어색하니 이벤트를 하나 만들자고 하더라. 마침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참가해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조명애를 내 지인 중 한 분이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한 것이 생각나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북측에서 좋아하면서 남남북녀 결혼 이벤트를 해보자고 했다. 남북 특사가 각각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했고, 두 분 다 승인해서 작업이 진행됐다. 베이징에서 양가 상견례까지 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방해에 나섰다. 신랑 어머니를 만나 조명애가 기쁨조라는 둥 험담을 늘어놓은 것이다. 이 작업을 한 사람은 국정원 감찰실 서기관인데 내가 쌍욕을 해준 뒤 남남북녀 이벤트가 무산된 과정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후 국정원에 대규모 책임추궁 인사가 있었다.


Q. 남남북녀는 무산됐지만 이후 이효리와 조명애가 함께 나온 삼성 애니콜 광고는 성사됐다.


A. 급하게 새로운 이벤트가 필요했고, 이때 떠오른 아이템이 내가 해본 분야인 광고였다. 나는 청와대가 직접 나서야 일이 풀릴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청와대가 들어줬고 삼성이 지원했다. 북쪽의 현송월이 참여하고, 감독은 차은택, 의상은 박술녀 씨가 맡았다. 나는 그림을 다 만들어놓은 뒤 그동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박기영 아자커뮤니케이션 사장을 불러 명예를 얻으라고 말했다. 이효리-조명애 애니콜 광고는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국가 사업이었다. 4월 광고촬영 이후 5월 개성에서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그 만남을 위해 광고 이벤트를 한 것이다.


박채서 씨는 2005년 이효리와 조명애가 출연한 삼성 애니콜 광고를 추진했다. 이효리는 영화 '공작'에도 본인 역할로 직접 출연한다.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Q. 이산가족 개별 상봉을 수차례 주선했던데?


A. 북한에 두고 온 자식을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해온 지인이 있었다. 나에게 간곡하게 북에 가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동안 중국에서 브로커들에게 수십억 사기를 당해왔다는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북에 알아봤더니 그게 이상하게 또 되더라.


Q. 이산가족을 중국을 통해 직접 북한으로 보내주는 방식인가?


A.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초청장을 받고 베이징에서 비행기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한 번은 북측에서 장성택의 형 장성우가 내 부탁이라고 하니 힘을 썼는지 헬기를 태워서 극진하게 대접해준 적도 있다. 모 중소기업 회장, 모 신문사 사주, 모 건설협회장, 모 연예인 등 많이 해줬다. 혹자는 내가 돈 받고 했다는데 맹세코 난 돈 받은 적 없다. 처음 해준 분이 고맙다며 차 한 대 사준 적 있는데 그것이 전부다.


Q. 안기부 요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37세 때다. 그때 전역하지 않고 계속 군생활을 했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었을텐데 후회한 적은 없나?


A. 내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굴곡된 인생이었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2010년 조사받을 때 검사가 나에게 "국가에 대해 배신감 느끼죠?"라고 묻더라. 그 대답을 1심 재판 최후진술 때 했는데 지금 다시 하겠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개인보다 국가 이익을 중시했고, 그 신념으로 살아왔다. 나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그걸 숙명으로 알기 때문에 배신감이나 후회는 적절치 않다. 다만 국정원은 비겁했다. 공작원에게 문제가 있다면 내부 규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굳이 법정에 세워놓고 창피를 주고 모욕감을 줬다. 내가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간첩질을 했다면 나를 총살시켜도 좋다. 지금도 리비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에 흑색요원들이 나가 있다. 그들은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국가를 위한다는 신념 하나밖에 없다. 만약 그들이 언젠가 법정에 설 수 있는 선례를 남기면 국가 이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Q. 2010년 긴급체포돼 6년형을 선고받고 2016년 5월 31일 만기출소했다. 당시 군사기밀을 넘겼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A. 지금까지 난 북측에 중요한 우리 기밀을 준 적이 없다. 그걸 준다는 것은 약점을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기밀을 북에게 넘길 만큼 내 신념과 사상이 약하지 않다. 내가 넘겼다고 하는 '작계 5027-04'는 본 적도 없다. 내가 주었다는 시점이 2005년인데 이미 2004년 8월 북한이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통해 그걸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누군가 주었고 넘어간 거다. 그런데 내가 그걸 2005년에 다시 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내가 북측에 건넨 것은 야전교범과 지도, 서해상을 찍은 비디오테이프 정도다. 그게 죄가 된다면 그 벌은 받겠다. 나는 그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걸 주고 개성공단을 조성할 수 있다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 그렇게 진행됐다. 국가보안법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사소한 것까지 다 트집 잡는다.


Q. 국정원이 보복했다고 생각하나?


A.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국정원 대규모 인사에 내가 관여됐다는 것을 그들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수 년 후 오래전 일로 나를 긴급체포했다.


Q.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후 국정원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의 국정원은 그때와 비교하면 어떻다고 보나?

A. 남북, 북미관계가 급변하는 요즘처럼 국정원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가 없다. 그런데 국정원은 계속해서 남북화해 분위기에 발목을 잡아왔다. 원장, 차장 등 수뇌부 몇 명 바꾼다고 변하지 않는다. 중간에서 정보 쥐고 안 놓는 집단이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원을 찾아가서 그들의 업적을 추켜세우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참 다급하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통제가 안 되는 거다. 최근 기무사에서 대통령에게 대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 조직 칼질한다니 조직보호망이 작동한다.


정보원은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이 말은 정보원이 교육받을 때 처음 듣는 말이다. 정보기관들이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마음을 되새기면 국정원이나 기무사가 바람직한 국가기관으로 거듭나리라 생각한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전 국가안전기획부 흑색요원 `흑금성` 박채서 씨.


Q. 이제 본인을 드러내기로 하고 세상에 나왔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건가?


A. 나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받고 싶다. 억울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6년이라는 옥고로 내 죗값을 이미 치렀다. 이제 지켜야 할 명예가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신념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일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이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일을 겪을 때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영화, 책, 드라마 등은 내가 활동하는 명분을 줄 것이다.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국민들이 보고 각자 판단해줬으면 좋겠다. 난 이제 남북문제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내 나이 이미 60대 중반이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Q. 영화의 속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A. 영화 '공작' 이후의 이야기는 한중합작 드라마 '시크릿 라인'(가제)으로 나올 거다. 노무현 정부 때 남남북녀 결혼 이벤트부터 시작하는 드라마다. 작년 9월 중국 CCTV 부사장과 한국에서 미팅을 했고, 12월 14일 가계약을 체결했다. 우리 쪽에서 제작하고 투자 마케팅은 중국에서 하는 식이다. 드라마가 끝나면 영화 속편을 한 편 더 만들 계획이다.



Q. 그동안 가족에게 미안한 점이 많았겠다.


A. 힘들 때 가족 생각하면서 버텼다. 내 아내는 좋은 결혼 상대가 아닌 나를 선택해 살아줬다. 아내는 내가 비밀요원이라는 것을 1998년 신문보도를 보고 처음 알았다.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해지더라. 그때 미국 CIA에서 망명 제의를 해왔다. 오산 미군기지를 통해 가족이 함께 도망가는 것이었는데 아내가 반대했다. 우리가 그렇게 떠나면 딸들은 도망자의 딸이라는 굴레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건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망명은 포기했다.


2010년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땐 8일 동안 단식한 적 있다. 한계점이 왔을 때 나는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아내가 면회 왔길래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다 정리해. 대한민국에서 살지 마." 그랬더니 아내가 한마디 하더라. "당신을 믿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이 여자를 두고 내가 떠날 수 없다. 그 말이 없었다면 나는 그때 감옥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동안 내 딸들도 마음의 병이 심했다. 두 딸이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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