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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영화계의 여왕’이라 불리던 그녀가 마침내 일을 냈다. 솔로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에 대한 평단의 극찬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거윅은 유난히 큰 키(175cm)에 시원스런 이목구비를 갖춘 외모, 그러면서도 장난끼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주목을 끌었다. ‘프랜시스 하’에서 사랑보다 우정을 택하고 익살스럽게 웃는 표정, 무용수로서 잘 풀리지 않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거짓말하고는 이내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 ‘매기스 플랜’에서 사랑의 유효기간을 깨닫고 남편을 전처에게 반품하겠다는 엉뚱함, ‘우리의 20세기’에서 자궁경부암에 걸린 것을 알고난 뒤 현실에 초연해진 모습이 내가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이다.
'프랜시스 하'(2012)
거윅이 맡은 배역은 대체로 발랄하고, 엉뚱하고, 귀여우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세상에 불만도 많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뉴욕 시내를 춤추며 활보하고, 고향을 떠나 뉴욕에 오니 정상인처럼 느껴진다며 웃기도 한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다며 절망에 빠져 있다가도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나 친구를 만나러 간다.
거윅은 산부인과 간호사인 엄마와 소상공인 대출을 담당하는 신용연합에서 일하던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1983년 8월 유난히 더웠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열정적인 아이’로 묘사한다. 카톨릭여학교인 성프란시스고교 졸업 후 춤을 배우고 싶어 뉴욕의 뮤지컬 극장 단원이 되고 싶었으나 진로를 바꿔 콜럼비아대 바나드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한다.
거윅은 극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석사(MFA) 지원 낙방 후 연기로 전향한다. 2006년 바나드 칼리지 재학 당시 그녀는 조 스완버그 감독의 'LOL'에 작은 역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스완버그 감독과 '한나 계단에 오르다'를 공동 집필했고, '밤과 주말'은 연출도 함께 했다.
이 당시 거윅이 출연하고 만든 영화들은 주로 ‘멈블코어’ 영화들이다. 멈블코어 영화란 뉴욕 인디영화의 서브장르로 자연스런 연기와 대화를 통해 2030세대 개인의 일상을 그린 영화를 말한다. 조 스완버그를 비롯해 앤드류 부잘스키, 린 셸턴, 마크 듀플라스, 제이 듀플라스, 아론 카츠 등이 멈블코어 영화를 만드는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거윅의 출연작 중엔 티 웨스트 감독의 ‘하우스 오브 더 데블’(2009)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작품들은 모두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절을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정말 우울했다. 내 인생 최고의 시기여야 하는데 난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내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때가 바닥이었다. 그녀는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비참하다고 생각한 시절은 돌이켜보면 그녀의 색깔을 정의하고 기본기를 갈고 닦는 시기였던 셈이다.
2010년 스물일곱살의 거윅은 노아 바움백 감독을 만난다. 무려 14살 연상인 바움백은 당시 제니퍼 제이슨 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거윅과 함께 작업하면서 2011년부터 파트너 관계가 된다(바움백은 2013년 제이슨 리와 이혼한다).
'그린버그'(2010)
거윅과 바움백 감독이 함께 한 첫 작품은 '그린버그'다(이 영화는 바움백과 제이슨 리의 마지막 합작품이기도 하다). 그녀의 상대역은 벤 스틸러였다. 벤 스틸러로서는 인디영화로 폭을 넓힌 것이고 거윅으로서는 드디어 메이저 할리우드 영화배우와 공연한 것이다. 뉴욕타임스 평론가 A. O. 스콧은 '그린버그'에서 거윅이 펼친 연기를 극찬했다. "그녀는 우리가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것을 재정의한다"고 평가했다.
이후 거윅과 바움백은 ‘프랜시스 하’를 공동집필한다. 스물일곱살 거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영화로 배우가 되기까지 방황하던 자신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시나리오에 녹였다. 흑백으로 찍은 ‘프랜시스 하’는 2013년 여러 매체에서 최고의 미국 인디영화로 평가받았고, 거윅은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매기스 플랜'(2015)
'우리의 20세기'(2016)
‘프랜시스 하’의 성공 이후 그녀에겐 캐스팅 제안이 쏟아졌다. '그녀는 방황하는 소녀들'(2011), '로마 위드 러브'(2012), '매기스 플랜'(2015), '재키'(2016), '우리의 20세기'(2016) 등에 출연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거윅이 바움백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쓰고 출연한 세 번째 작품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는 바나드 칼리지 시절의 자신을 모티프로 한 영화다. 홀로 뉴욕에서 신입생 생활을 시작한 트레이시(롤라 커크)는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한 의붓 언니 브룩(그레타 거윅)을 동경하지만 점점 브룩의 삶이 허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이 영화 역시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82%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
이처럼 연기와 각본 작업을 병행하던 그녀는 드디어 2015년 홀로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직접 연출까지 하기로 결심한다. 2008년 조 스완버그 감독과 ‘밤과 주말’을 공동 연출한 적은 있지만 단독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거윅은 몇 년 동안 이 영화 시나리오에 매달렸다. 가제는 ‘엄마와 딸’이었다. 영화는 거윅 자신의 반자전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 속 내용이 실제와 얼마나 비슷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영화 속 어떤 사건도 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공명하는 진실의 순간이 담겨 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거윅은 출연진과 스탭들에게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졸업앨범, 사진, 일기 등을 보여주고 고향을 구경시켜 줬다. 그녀는 이 영화가 ‘추억’처럼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400번의 구타', '보이후드'의 여성 버전을 만들고 싶다"는 게 목표였다.
‘여성영화’라는 그녀의 포부처럼 이 영화는 감독, 작가, 주연 배우가 여성일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도 여성이 맡았다. 거윅의 매니저 에블린 오닐이 프로듀서로 합류했다.
주연을 맡은 시얼샤 로넌과 거윅은 2015년 9월 토론토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거윅은 ‘매기스 플랜’, 로넌은 ‘브루클린’ 홍보를 위해 영화제를 방문한 참이었다. 거윅은 로넌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주고는 호텔방에서 함께 리딩을 했다. 두 페이지쯤 읽고 있을 때 거윅은 로넌이 주인공 크리스틴 역에 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듬해 1월 로넌은 공식적으로 캐스팅됐다.
이후 트레이시 레츠, 로리 멧칼프, 루카스 헤지스, 티모시 찰라멧, 비니 펠드스테인, 스티븐 맥킨리 헨더슨, 로이스 스미스 등의 출연이 확정됐다.
'레이디 버드'(2017)
촬영은 2016년 3월 예정이었으나 로넌의 스케줄 문제로 8월로 연기됐다. 새크라멘토와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에서 촬영했다. 로넌은 분장을 거의 하지 않아 여드름이 드러난 채로 연기했고 머리카락도 붉게 염색했다. 로넌은 "10대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거윅은 다른 사람들보다 현장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해 하루 일정을 짰는데 이는 '매기스 플랜'의 감독 레베카 밀러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또 그녀는 현장에서 스마트폰 이용을 금지했는데 이는 노아 바움백의 원칙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지난 10년 간 영화 현장에서 어깨너머로 감독들에게 배운 방식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았다.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
그렇게 완성된 이 영화가 바로 '레이디 버드'다. 뉴욕 인디영화를 주로 배급하는 A24가 판권을 구입했고 영화는 2017년 9월 텔룰라이드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11월 개봉했다. 1천만 달러의 예산을 들인 영화는 현재까지 3500만 달러 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A24의 영화들 중 ‘문라이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다. 타임지와 AFI는 ‘레이디 버드’를 2017년 톱10 영화로 선정했다. 2018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수상했고, 여우조연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9년 전 자신만 홀로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해 하던 스물다섯살 소녀는 서른네살이 된 지금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그녀의 커리어를 돌아보면서 성공 비결을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고 전진했고 그것이 결국 통한 것이다. 과연 그녀는 반복되는 실패와 낙담 속에서도 수년 동안 자신의 시나리오를 끈기 있게 준비했고, 남들과 다르다고 느낀 개인사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췄으며, 주위 감독들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제75회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후 소감을 발표하는 그레타 거윅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여성 감독이자 배우인 그레타 거윅의 차기작은 마블 히어로도 아니고 액션 블록버스터도 아니다. 그녀는 두 살 언니인 ‘다가오는 것들’의 프랑스 감독 미아 한센뢰베를 만나 '베르히만 섬'을 촬영할 예정이다. 이 행보만 봐도 거윅은 무엇이 자신에게 필요한지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어떤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줄 때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한센뢰베와 그녀의 남편 올리비에 아싸야스, 그리고 영화의 테마인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르이만 감독 역시 그녀에게 ’어깨’가 되어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은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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