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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불 땐 스릴러 한 편 어떠세요? 으스스한 분위기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겨울 칼바람 속 거리 풍경이 왠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겨울과 스릴러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어서인지 올해 겨울에도 어김없이 극장가에 스릴러 영화들이 돌아왔습니다. 11월 29일 같은 날 개봉한 세 편의 영화가 공교롭게도 모두 스릴러이고 또 복수극입니다. 두 편은 한국영화, 다른 한 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추리소설을 극화한 할리우드 영화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볼까요?



<기억의 밤> 반전을 거듭하는 롤러코스터


영화의 배경은 1997년. 형제인 유석(김무열)과 진석(강하늘)은 아빠(문성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새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진석은 뒷좌석에서 엄마(나영희) 품에 기대 잠들어 있고 유석은 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네요. 참 화목해 보이는 가족입니다.


재수생인 진석에게 대학생인 유석은 저만치 멀리 있는 존재입니다. 형은 한쪽 다리를 절지만 착하고 똑똑하고 사교성 있고 리더십도 있어서 늘 주위에 사람이 많습니다. 진석은 형을 자랑스러워하며 잘 따릅니다.


새로 이사 온 집은 계단이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입니다. 진석과 유석은 2층의 방 하나를 나눠 씁니다. 사실 방 하나가 더 있어서 진석은 내심 자기 방을 갖기를 바랐는데 아버지는 그 방은 절대 열지 말라고 해서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왠지 더 들어가 보고 싶은 법이잖아요. 한밤중에 진석은 악몽을 꾸고는 깨어나 복도로 나갔다가 그 방문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형이 막아서는 바람에 실제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지만요.



그렇게 새 집에서 적응기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형이 집 앞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형이 사라진 뒤 진석은 밤마다 악몽을 꾸고 식은땀을 흘립니다. 오매불망 형을 기다리던 가족 앞에 형은 19일 만에 나타납니다. 도대체 납치된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형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사는 형이 일종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날 이후 형은 달라졌습니다. 외모는 분명 형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형 행세를 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평소와 반대쪽 다리를 절기도 하고, 무서운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또 매일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낯설어진 형 때문에 진석은 어리둥절합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석은 큰 맘 먹고 밤에 집밖으로 나가는 형을 미행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기억의 밤>은 스포일러 방지를 워낙 강조하는 영화입니다. 시사회에서도 초반 60분만 보여주고 그마저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할 정도로 스포일러에 촉각을 곤두세웠지요. 왜 이렇게 유난일까 싶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지막 10분까지도 예측하기 힘들었습니다.


제목과 달리 ‘기억하지 못하는 밤’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 밤에 대한 기억을 찾으려는 남자가 그 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복수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배경이 1997년이니만큼 외환위기 시절 아픈 기억을 가진 관객이라면 더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김무열의 매순간 표변하는 연기가 강렬하고, 강하늘은 후반부에 지금까지의 선한 청년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강하늘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장항준 감독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9년 만에 내놓은 이번 영화에선 제대로 칼을 갈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특기인 코미디를 버리고 처음으로 스릴러를 시도했는데 가족영화로 출발해 사적 복수극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만큼은 꽤 탄탄해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집중하게 됩니다.



<반드시 잡는다> 연쇄살인범 잡는 두 노인


<기억의 밤>이 20년 전과 현재가 교차하는 이야기라면 <반드시 잡는다>는 30년 전의 연쇄살인범이 다시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들은 다들 노인입니다. 심덕수(백윤식)는 낡은 아파트에서 세입자들에게 월세 받으며 살아가는 구두쇠 집주인이고, 박평달(성동일)은 30년 전 놓친 범인을 눈앞에서 놓친 것이 한에 맺힌 전직 형사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마을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이 하나둘 죽어갑니다.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고독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심덕수는 월세를 독촉하려 세입자인 최씨(손종학)를 찾아갔다가 전직 형사였다는 그에게서 놀라운 추리를 듣게 됩니다. 죽은 노인들이 자연사가 아니라 살해당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덕수는 굳이 노인을 왜 죽이냐며 그 말을 믿지 못하죠.



다음날 아침 심덕수가 최씨의 집을 찾아가 보니 그가 목을 메 자살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월세 독촉 때문에 세입자가 자살했다며 수근거리고 심덕수는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합니다.


심덕수는 외롭게 죽은 최씨의 집으로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최씨의 집 안에 한 남자가 있네요. 그는 자신을 전직 형사 박평달이라고 소개합니다. 최씨의 30년 전 동료였다고요. 그는 최씨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살인마가 이 동네에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죽음들이 30년 전 장기미제 사건과 동일한 수법이라며 범인은 이제 곧 본격적으로 젊은 여자들을 죽일 거라고 확언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덕수는 205호에 사는 김지은(김혜인)이 떠오릅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무리 욕해도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던 그 젊은 여자의 집에서 어젯밤 쿵 소리가 몇 번 났었거든요.



심덕수는 박평달과 함께 205호 문을 열고 들어가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지은이 납치된 흔적을 발견합니다. 이제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범인을 잡기로 합니다. 심덕수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젊은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박평달은 30년 전의 복수를 위해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추적을 강행합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의 <레드>, 나문희, 김수미, 김혜옥의 <육혈포 강도단>처럼 영화는 실버 세대에 이른 주인공들이 합심해 큰 사건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 나이에 어떻게 범인을 잡느냐며 손사래 치던 심덕수는 나중엔 혼자서 용의자의 은신처에 잠입할 정도로 온몸을 불사릅니다.



실버 세대를 겨냥한 영화라서인지 클로즈업을 자제하고 풀샷 위주의 화면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심덕수, 박평달, 그리고 나이 든 범인이 느릿느릿 육박전을 벌이는 클라이막스 장면에선 묘한 안쓰러움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 속 사건들은 한국에서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형호 유괴사건,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신정동 엽기토끼 살인사건 등을 모티프로 했다고 하는군요. 그 사건들의 범인이 다시 나타난다면 과연 그때 그 형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영화로 원작은 제피가루 작가의 인기 웹툰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입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특급 배우들의 명연기


어릴 적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한 편쯤 집어 들어 본 기억 있으실 겁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비롯해 ‘ABC 살인사건’, ‘벙어리 목격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 80여 편의 소설을 남긴 그녀는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죠.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 탐정은 사실 셜록 홈즈보다는 인기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괴팍한 성격과 별 볼일 없는 외모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60센티미터가 겨우 넘는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 왁스로 고정한 일자형 콧수염, 벨기에인 특유의 투덜거리는 성격이 왠지 어린 마음에는 정이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개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직접 연기한 에르퀼 푸아로 탐정은 소설 속 인물과 달리 중후한 젠틀맨으로 변신했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보는 그는 키도 크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발군의 추리력으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합니다. 아마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해 새롭게 부활한 셜록 홈즈를 의식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데요. 푸아로는 이 영화에 이어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을 각색한 영화에도 등장할 예정이어서 계속해서 중년 탐정으로 인기를 모아갈 지 기대됩니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제 막 하나의 사건을 해결한 푸아로는 이스탄불에서 사건을 의뢰받고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탑승합니다. 부유한 래칫(조니 뎁)이 열차 안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며 자신의 보디가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지만 푸아로는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순합니다. 래칫의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푸아로는 직감에 의해 판단하는 탐정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균형과 질서입니다. 그는 한쪽 발로 개똥을 밟으면 다른 쪽 발로도 마주 밟아 균형을 맞춰야 하고, 계란 두 개가 있으면 높이를 맞춰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균형을 중시합니다. 래칫은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푸아로는 균형을 위해 그의 의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날 밤, 눈사태가 벌어져 열차가 멈춰 섭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래칫이 죽어 있습니다. 눈사태로 멈춰 선 기차라는 밀실에서 범인은 승객 13명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푸아로는 한 명씩 수사해 가는데 승객들에게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고 또 래칫을 죽여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푸아로는 미궁 속에 갇힌 기분입니다. 도대체 눈사태가 벌어진 그날 밤,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영화는 중반부에 푸아로가 승객 13명을 차례로 취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이야기 구성이 다소 헐거워진 부분은 있지만 후반부 감동적인 엔딩은 이 모든 아쉬움을 잊게 해줍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는 설원 속 테이블에 일렬로 늘어선 13명의 승객 앞에서 푸아로가 자신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90년 전 발표된 원작이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 역시 복수극입니다. 인면수심 ‘공공의 적’ 래칫이라는 인물을 향한 사적 복수심이 이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죠. 지금이야 이 소설의 결말과 유사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지만(<친절한 금자씨> 등) 당시에는 센세이셔널한 엔딩이었습니다.


이성과 균형이 우선이던 푸아로는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뒤 감성과 불균형을 믿게 됐다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여러분은 모두 무죄입니다.” 푸아로는 승객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 노을이 지는 기차역에서 유유히 다음 사건을 의뢰받은 이집트로 떠납니다.



조니 뎁, 미셸 파이퍼, 윌렘 데포,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데이지 리들리 등 초호화 캐스팅은 이 영화를 봐야 할 또 다른 이유입니다. 주디 덴치는 단지 앉아만 있을 뿐인데도 카리스마가 폭발하고, 데이지 리들리는 <스타워즈>에서와 전혀 다른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1980~1990년대 할리우드의 여신이었던 미셸 파이퍼는 승객들 중 가장 큰 아픔을 지닌 허바드 부인으로 분해 손동작 하나까지도 집중하게 하는 명품 연기를 선보입니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이 특급 배우들의 얼굴을 스펙터클로 잡아내기 위해 영화를 디지털이 아닌, 전 세계 4대 뿐이라는 6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덕분에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에 눈이 즐거워집니다. 또 실제로 만들어 촬영한 거대한 열차 세트, 1920년대 의상의 꼼꼼한 고증 등은 이 영화의 제작진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 소설을 얼마나 애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세 편 모두 복수를 소재로 한 스릴러이지만 분위기와 눈여겨 볼 포인트는 전혀 다릅니다. <기억의 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기막힌 스토리의 재미를 갖춘 영화이고, <반드시 잡는다>는 한국 사회의 고독사 문제를 살짝 건드리면서 좌절하고 있는 노인 세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영화입니다. 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모두가 아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영상미와 특급 배우들의 명품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찬바람 불어 점점 두꺼운 외투를 찾게 되는 요즘, 따뜻한 극장에서 신선한 스릴러 한 편 즐겨보시는 것 어떨까요?


(SK하이닉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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