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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세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가는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타니 벌써 7시 반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한여름 백야를 기대했건만 여기는 아닌가 보다. 기차가 출발하니 역방향이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보였다. 은은한 노란색 태양빛이 붉은 빛을 강조해주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서 붉은 빛은 삼엽수에 가렸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긴 여정에 졸음이 몰려왔다.
기차 안에는 중국인 관광객 몇 명, 그리고 비니를 쓴 러시아 남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부부가 앉아 있었다. 다들 서로를 흘끔 쳐다볼 뿐 말은 없었다.
35분 후 기차가 종점에 내렸다. 여기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야 한다. 지하철은 복잡하다. 고속 에스컬레이터는 한참을 내려간다. 키릴문자는 낯설어서 도대체 어느 방향에서 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마터면 5호선 열차를 탈 뻔했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한 끝에 2호선 플랫폼을 찾았다. 배차간격은 참 좁다. 열차는 떠났나 싶더니만 또 금방 금방 온다.
3정거장을 이동해 지하철에서 빠져나왔다. 8시 반. 밖은 어둡다. 붉은 광장 근처 숙소지만 붉은 광장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까운 거리에 볼쇼이 극장의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이 있는 거리가 번화가인 듯하다. 2차선 도로에 차들이 빽빽하다. 길죽한 파란색 버스에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운행 중이다.
웅장한 건물들이 환한 빛을 밝히는 거리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지나간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토요일 밤이다. 나는 거리 사진을 찍고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 건물도 웅장하다. 1층에 명품숍이 있는 대형 건물이다. 옆문이 공사 중이어서 겨우 출입문을 찾았다.
Since 1902. 호텔 메트로폴 내부에 장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낡은 엘리베이터는 그래도 꽤 빠르다. 키카드를 받아 3층으로 올라와 복도를 계속 걷는다. 3층 홀에 호텔 사장과 이 호텔에 묵었던 귀빈 사진이 전시돼 있다. 마이클 잭슨,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 일본 총리 뿐만 아니라 김정일과 찍은 사진도 있다. 사진 아래 캡션을 보니 김정일은 2001년 이 호텔에서 묵었다.
호텔 방은 넓다. 침실 위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욕실도 크다. 바닥에 개수구가 있어서 샤워실이 따로 분리돼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커튼을 따로 달아놓았다. 어메니티도 잘 갖춰졌다. 키카드 꽂는 곳은 당연하게도 없다. 여긴 오래된 호텔이다. 전자동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전등 스위치 찾느라 헤매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아날로그는 스위치 위치가 확실하니까.
크렘린으로 갔다. 입장료 사는 줄만 30분을 섰다. 4가지 종류의 티켓이 있다. 무기고, 성당, 광장, 이반대제벨종. 나는 성당 티켓만 샀다. 입구를 못찾아 헤매다가 지나온 길에 크렘린 입구를 발견했다.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모처럼 탁 트인 공간이 나오자 시원해졌다. 3개의 황금색 돔을 가진 사원이 3개 나타났다. 모스크바에서 이처럼 웅장하지 않은, 아기자기한 건물은 처음이었다. 사원 내부는 꽤 컸다. 2층까지 개방돼 있어 한 바퀴 둘러봤다.
사원을 나와 걷자 모스크바강이었다. 무기고를 지나 크렘린을 빠져나왔다. 공원이 나오고 그 앞에 거대한 동상이 보였다. 십자가를 들고 있는 블라디미르대공 동상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 지역의 단연 랜드마크다.
모스크바강을 다리로 건너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까지 걸었다. 다리를 건너자 한적한 골목길이 나타났다. 미술관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어수프와 러시아식 만두를 주문했다. 수프는 좋았지만 만두는 짰다. 그래도 이 식당은 음식을 잘 하는 집이었다.
미술관에서 17~18세기 러시아 그림들을 봤다. 춥고 바람부는 길을 걷느라 지쳤는데 모처럼 그림을 봤더니 기분이 좋아졌다. 러시아 미술은 고통을 주는 자연에 굴복하거나 싸우는 과정, 민중 대서사 중심 작품이 많은 듯하다. 늑대를 타고 달리는 소년과 소녀가 있는 그림은 스토리가 궁금했다. 나중에 찾아볼 수 있기를.
미술관에서 위쪽으로 걷는 길에 자신을 알렉산드라 사샤라고 말하는 추리닝을 입은 남자를 만나 사진을 찍었다. 러시아에서 먼저 접근해 반갑게 인사한 사람은 처음이다. 그는 나에게 이메일 주소를 남겼다. 사진을 보내주기로 했다.
다시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간다. 아르바트 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곳곳에서 버스킹이 펼쳐진다. 기타와 드럼과 바이올린 트리오 앞에서 공연을 보다가 또 걷는다. 열정은 좋은데 실력은 별로다.
중고책 서점, 카페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스타벅스에서 모스크바 머그컵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텀블러를 사고 아이스티를 마셨다. 빅토르 최 추모벽까지 걸었다. 벽 하나가 그래피티로 가득했다.
오던 길을 돌아서 굼 백화점으로 걸었다. 해가 저물어갔다. 드럼을 치는 군악대 공연을 잠깐 보고 통행이 금지된 붉은광장을 우회했다. 성악을 하는 버스커를 동영상 촬영하느라 배터리가 방전됐다. 굼 백화점으로 갔다. 건물들은 확실히 밤에 훨씬 멋지다. 백화점 내부는 다른 서양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백화점을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알룐카 초콜릿에 들러 아이 그림이 그려진 초콜릿을 샀다. 그 맞은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1970년대풍 소련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갖춘 식당이었다. 사람이 많고 웨이터는 바빠보였다. 모히토 한 잔과 비프 필레를 먹었다. 괜찮은 식사였다.
호텔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너무 많이 걸어서 발바닥이 아플 정도였다. 내일은 무식하게 걷지 않아야지. 호텔에 도착하자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3회로 계속)
모스크바 지하철
1935년 개통된 모스크바 지하철은 12개 노선에 182개 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전 5시 30분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영업합니다. 열차 간격은 보통 약 2분이라지만 체감 속도는 1분에 한 대꼴로 정말 자주 옵니다. 일일 이용자는 평균 655만명. 주중에는 700만명을 초과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도쿄 지하철 다음으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지하철입니다.
모스크바 지하철을 타려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지하로 내려가야 합니다. 내릴 때는 반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차이기 때문에 내릴 것이 아니라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주의해야 합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는 영어 표기가 없습니다. 저는 키릴어를 몰라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12개 노선이 있기 때문에 숫자를 잘 보고 맞는 노선에 맞는 방향인지 몇 번씩 그림 문자를 확인해가며 탔습니다. 열차가 자주 오기 때문에 빨리 가려 하지 마시고 천천히 이동하세요.
호텔 메트로폴
볼쇼이 극장 앞에 위치한 호텔 메트로폴은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오래된 만큼 유명하고, 유명한 만큼 명사들이 즐겨 묵었던 곳이죠. 호텔 2층에 사진 전시실이 있는데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 등 할리우드 스타들은 물론 일본 총리, 유럽 정치인, 러시아 정교회 수장 등이 이곳에 온 기념사진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김정일의 사진인데요. 그는 2001년 이 호텔을 찾았다고 하네요.
건물 자체도 문화재급 위상을 자랑할 뿐더러 위치도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 붉은 광장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습니다. 방은 17만원짜리 디럭스룸부터 300만원짜리 방까지 다양합니다. 이곳 조식은 4만원이나 합니다. 저는 조식은 예약하지 않았는데 여기 조식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군요.ㅠ
크렘린
크렘린(크레믈, Кремль)은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모스크바 외 노브고로드, 니즈니노브고로드, 카잔, 아스트라한에도 크렘린이 있지만 크렘린 하면 일반적으로 모스크바를 가리킵니다.
옛 러시아 제국의 궁전이던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중심인 보로비쯔끼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로비쯔끼 언덕은 모스크바강과 녜글린나야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기원전 2천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12세기 방어시설로 세워진 조그마한 목조 성채가 크렘린의 시초라고 합니다.
크렘린은 15세기말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성채의 윤곽은 삼각형의 모양을 띠고, 성벽의 총 길이는 2.24km에 달합니다. 이 성벽을 따라 20개의 성문과 18개의 군사용 탑이 있습니다.
크렘린은 남쪽의 모스크바강, 북동쪽의 붉은 광장, 북서쪽의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길이는 125m, 높이는 47m, 전체 면적은 약 26헥타르(25,000 평방미터) 정도입니다.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건물 안에는 각 시대별로 크고 작은 아홉 개의 궁전과 성당, 탑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700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렘린의 모습은 17세기에 갖추어졌습니다. 이때 대규모 건축 활동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된 후 1922년 소련 탄생 이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의회가 설치되면서 소련 공산당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때 크렘린 내 많은 성당들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당 대회 회관이 건설되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관저와 정부 기관이 이곳에 있습니다.
1812년 크렘린과 붉은 광장 사이에 해자를 둘러 크렘린으로 가려면 붉은 광장을 돌아가야 합니다. 크렘린과 붉은 광장은 1990년에 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티켓 오피스로 가면 4가지 종류의 크렘린 티켓을 팝니다. 하나는 무기고 티켓, 또 하나는 성당과 유적지 티켓, 또 하나는 이반 대제의 종탑 티켓, 또 하나는 열두 사도 성당 티켓입니다. 이처럼 각각 티켓을 따로 사야만 크렘린 내에서 원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주세요. 저는 성당 티켓 하나만 구입해서 성당만 둘러보고 왔습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의 상인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98)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수집한 작품들로 시작된 미술관입니다. 1856년에 개관해 1892년에 모스크바로 이전했습니다.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 사이 13만점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장엄하고 서사적이고 자연에 힘겹게 맞서는 러시아 민중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아르바트 거리
모스크바의 최대 번화가로 모스크바에서 젊음을 느끼고 싶다면 꼭 찾아야 하는 곳입니다. 모스크바 지하철 아르바트스코-포크롭스카야선의 아르바츠카야 역과 스몰렌스카야 역 사이에 있습니다. 구 아르바트와 신 아르바트로 나뉘는데 신 아르바트 거리는 전형적인 유럽식 번화가라서 그다지 감흥이 적고, 구 아르바트 거리에 명소가 많습니다.
거리에는 버스커들, 화가들, 상점들이 가득합니다. 거리의 중간 지점에는 러시아의 대표 가수 빅토르 최를 추모하기 위한 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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