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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극장에 관객이 가장 많은 계절입니다. 한해 2억 명의 관객 중 5천만 명 이상이 7~8월에 몰립니다. 단순 수치로 계산하면 한국인 전체가 이 시기에 영화를 보는 셈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대목인 이 기간에 최고로 공들인 영화를 내놓습니다. 영화사의 그해 최고 기대작으로 우뚝 세운다는 의미로 ‘텐트폴’ 영화라고 하죠. 보통 톱스타들이 나오는 액션 영화들이 텐트폴 영화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올해 여름 화제작 중에는 공교롭게도 역사 속 실화를 다룬 영화들이 많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린 <택시운전사>,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된 지옥의 탄광 섬을 무대로 한 <군함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소재로 한 <덩케르크> 등입니다. 극장을 역사 현장으로 만든 세 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택시운전사> 5.18에 두고 온 손님


<의형제>(2010)의 장훈 감독과 송강호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택시운전사>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영상 취재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힌츠페터는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된 광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한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에 대해서는 김사복이라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영화는 이 의문의 택시기사를 당대를 살아간 평범한 소시민으로 상상한 뒤 그를 통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돌아봅니다.


영화는 서울의 개인택시 기사 김만섭(송강호)의 소소한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먹고 살기 바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없는 중년 가장인 그는 최루탄 날리는 거리에서 인중에 치약을 바른 채 영업을 계속합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외국인으로부터 광주까지 다녀오면 무려 1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무작정 그를 태웁니다.



만섭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일할 때 배운 짧은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소통이 잘 될리 없습니다. 힌츠페터는 광주가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취재하러 가는 길이었고요. 만섭은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몰라 돈을 놓고 티격태격합니다. 광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영화는 마치 버디무비처럼 밝고 경쾌한 분위기입니다.


어렵게 검문을 뚫고 광주에 도착한 뒤부터 상황은 바뀝니다. 만섭이 목격한 광주는 전쟁터를 방불케합니다. 이 역사적 현장에서 만섭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힌츠페터 역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합니다. 두 사람은 광주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도망다니기를 반복합니다.



총제작비 150억원이 투입된 <택시운전사>는 한 평범한 외부인의 시점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됩니다.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등 지금까지 지금까지 5.18을 그린 영화들은 희생자에 초점을 맞춰 시종일관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였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만섭은 점점 변해갑니다. 특히 그가 광주를 빠져나와 순천에서 국수를 먹는 장면은 큰 울림을 줍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시내 풍경과 왜곡보도하는 언론을 지켜보면서 그는 꾸역꾸역 면을 삼키는데 한 사람의 인생관이 바뀌는 순간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하는 송강호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만섭은 광주에서와 달리 너무나도 쉽게 서울의 딸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걸 알게된 뒤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더 늦을 거야. 광주에 손님을 두고 왔거든.”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아픈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적확하게 표현한 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거운 역사 현장을 최대한 힘 빼고 가벼운 터치로 담아낸 영화는 택시운전사와 외신기자의 광주 탈출 과정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일부 지나치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실제 힌츠페터의 생전 인터뷰를 삽입해 끝내 실화에서 오는 감동을 이끌어냅니다.



<군함도> 일제강점기 지옥의 섬 탈출극


류승완 감독의 첫 시대극인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잊혔던 지옥의 섬을 조명합니다. 일본 나가사키 남서쪽 약 18km에 위치한 인공 섬 ‘하시마’는 일본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는데요. 19세기말 석탄 채굴이 시작되고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가 건설돼 일본 입장에선 산업혁명의 상징인 장소지만, 우리에겐 강제노동과 의문사의 서러운 역사를 가진 곳입니다.


1943년부터 일제는 조선 청년 강제동원령을 내렸고, 약 800명의 조선인들이 이곳에 끌려와 지하 1000미터 깊이의 탄광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했습니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가스 폭발 사고와 영양실조 등으로 이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젊은이들이 많은데 공식 집계된 사망자만 134명에 이릅니다. 누락되거나 은폐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겠죠. 2015년 9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이 섬을 찾아가 위령비에 헌화하고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함도의 비극이 대중에 알려졌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슬픈 역사의 장소를 배경으로 삼지만, 이를 마냥 어둡고 무겁게만 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경쾌하고 재치 있는 액션영화가 장기인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를 무대로 실제로 있을법한 여러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허구의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그 속에는 권력 암투도 있고, 추종자와 배신자도 있고, 무뚝뚝한 로맨스도 있고,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아빠와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암살> <밀정> 같은 내부 첩자를 그린 독립군 스토리에 <실미도> 같은 탈출극을 결합했다고 보면 맞을 듯합니다.


영화는 다양한 배경의 조선인들이 군함도로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경성 반도호텔 악단장 이강옥(황정민)은 조선에서 사고를 친 뒤 딸 소희(김수안)와 함께 배를 타고요. 일제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온 말년(이정현)은 위안부로 끌려오고,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주먹 최칠성(소지섭)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군함도로 향합니다. 광복군 소속 OSS 요원 박무영(송중기)은 독립운동가 윤학철(이경영) 구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입한 경우이고요.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초반부는 군함도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 조선인들의 실상을 보여주고, 중반부는 일본군의 핍박에 분열된 조선인들이 내부 대립을 벌이는 모습을 긴박하게 담고, 후반부는 마침내 갈등을 극복하고 단합한 조선 민중이 섬을 탈출하는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이 노래 제가 불렀어요. 저 노래하고 춤추고 다 잘할 수 있어요.” 위안부가 된 소희가 울면서 일본군 책임자에게 하소연하는 이 대사가 영화 초반부를 상징한다면, “이래서 조선 사람들은 안 된다는 소리 듣는 거야.” 강옥이 내분에 휩싸인 조선인들을 향해 내뱉는 이 대사는 중반부의 분위기를 드러내주죠. “어차피 이리 된 거 싸워나 보고 죽자.” 후반부엔 한 조선인이 전의를 불태우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영화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겠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베테랑>까지 류승완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한결 같았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부러질지언정 당당하게 맞서 싸우자는 것이죠. <군함도>는 그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극의 역사를 좀더 꼼꼼하게 고증하길 바랐던 관객은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상업영화로선 무난한 선택일 듯합니다.


영화의 총제작비는 무려 260억 원에 달하는데 이는 대부분 군함도를 재현하는데 쓰였습니다. 춘천에 위치한 6만6000제곱미터 규모의 땅에 9개월 동안 지은 초대형 세트는 실제 군함도의 3분의 2 크기라고 하는데요. 군함도의 상징인 탄광 내부뿐만 아니라 선착장의 계단, 유곽, 학교 운동장, 식당, 일본인 직원 구락부 등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영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사용된 철제 사다리는 실제 군함도에 존재했던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해 수십 명의 인원이 매달린 결과물이라죠.


2015년 군함도는 일본 정부의 로비에 의해 일본 산업혁명의 상징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만, 일본 측은 아직도 이 섬에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가 모쪼록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덩케르크> 제2차 세계대전 사상최대 탈출 작전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당시 세계 최강이던 독일군에 맞서 싸우다 패퇴한 연합군의 철수작전을 소재로 합니다.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과 연합군은 무려 40만여 명. 이들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가기 위해 해안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당시 처칠 영국 수상의 목표는 3만여 명이었다고 하죠. 그 정도만이라도 살아서 돌아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덩케르크 철수 작전(작전명 ‘다이나모(Dynamo)’)은 대성공을 거두어 대략 33만 명이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들은 전열을 가다듬은 뒤 이후 반격의 선봉에 서며 연합군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는지 일단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마지노선’의 붕괴로부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장군 이름을 딴 강고한 요새인 마지노선은 1930년에 지어진 이후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막강 기갑부대가 1940년 마지노선을 돌파하고 진격합니다. 연합군은 후퇴를 거듭해 결국 해안에 고립됩니다. 연합군은 항복하거나 섬멸당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히틀러가 상황을 오판해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막강한 독일 육군은 발이 묶이고 이때를 기해 영국 본토에서는 덩케르크로 선박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구축함뿐만 아니라 화물선, 유람선, 요트, 통통배, 낚싯배 등 900여척에 달하는 민간 어선들이 연합군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철수가 시작되고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독일군은 대규모 전투기를 출격시켜 해안을 포격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영국 공군이 엄호에 나서죠.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공중전을 벌였다는 영국 공군의 전설적인 일화도 존재하는데 영화는 이 일화를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덩케르크>는 일주일간 벌어진 덩케르크 철수 작전 과정을 세 가지 시점으로 보여줍니다. 해안에 늘어선 병사들의 시점,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떠난 민간인 어선의 시점, 하늘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전투기 조종사의 시점입니다. 해안의 병사는 일주일, 민간인 배는 하루, 조종사는 한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는데요. 서로 다른 시간의 길이만큼 해안에서의 사건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하늘의 조종사에게는 같은 시간도 매우 빨리 흘러 연료가 금세 바닥납니다.


세 가지 시점마다 주요 등장인물이 있습니다만 영화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클로즈업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한두 사람의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들이 함께 공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역사를 바꾼 덩케르크 철수 작전 성공의 의의를 기립니다.



감독은 1500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를 출연시키고, 실제 스핏파이어 전투기와 선박 등을 공수해 영화에 사실성을 높였습니다. 서사가 단순하고 캐릭터가 강조되지 않다보니 영화 초반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몰입이 쉽지 않습니다만, 세 가지 시점의 스토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중반 이후엔 작전 성공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삶의 생사가 갈리는 지점이 차분하게 그려져 억지 감동을 이끌어내는 여타 전쟁 영화와 차별화됩니다. 구축함과 민간 선박들이 일제히 진격할 때 흐르는 한스 짐머의 음악 역시 감동적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 일제 강점기의 지옥섬, 2차 세계대전의 덩케르크 해안 등 올해 여름 극장에 걸린 대작 영화들은 역사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세 편 모두 뜨거운 가슴을 필요로 하는 영화들입니다. 또 비극의 역사 한복판의 주인공은 슈퍼히어로 같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찾은 극장에서 2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그때 그 시절,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SK하이닉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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