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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2016년 11월 공개한 <더 크라운>이 최근 열린 제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시리즈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재위기간 65년째로 영국 역사상 최장기 왕이자 최근 영국인들 설문조사에선 빅토리아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역대 최고의 왕으로 꼽힌 엘리자베스 2세의 거의 전생애를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총 60부작으로 기획돼 작년 시즌 1의 10회가 공개됐고요. 올해 시즌 2가 선보입니다.
시즌 1은 공개되자마자 호평받았고 저도 작년 말부터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이번 주말 몰아서 보게 됐는데요. 한 마디로 섬세하고 우아하고 고증이 완벽한 사극입니다. 잘 알려진 역사와 왕실이라는 고리타분할 수 있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심리묘사를 통해 갈등을 끌어내는 연출력이 놀랍습니다. 베일에 쌓여 있던 영국 왕실의 속살을 엿보는 재미도 있고, 위인전에도 오른 윈스턴 처칠의 총리 시절 노쇠한 모습을 재현한 것은 덤이죠. 이 드라마를 놓치지 말아야 할 3가지 이유를 꼽아봤습니다.
1. 섬세한 연출과 꼼꼼한 고증
시즌 1은 1947년부터 1955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1947년 결혼, 1952년 왕위 계승, 1953년 대관식을 치르죠. 중간중간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를 계승한 1936년 무렵이 회상으로 등장합니다.
1회가 시작하면 건강이 악화된 조지 6세가 기침을 하면서 덴마크와 그리스, 노르웨이의 왕자 필립 마운트배튼에게 에든버러 공작 작위를 내립니다. 다음날 큰 딸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사위를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절차입니다.
성대한 결혼식이 열리고 하객들이 찾아옵니다. 노쇠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 현직 총리 네빌 챔버레인도 받지 못한 기립박수를 받습니다. 1947년은 2차대전의 영웅 처칠이 일시적으로 은퇴한 뒤입니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의 챔버레인 총리는 사회주의 정책을 도입하며 조지 6세 국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요. 드라마는 이런 미묘한 신경전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위를 맞이한 국왕, 긴장한 엘리자베스의 심경 등을 세심하게 담아냅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꿈꾸던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 생활에 빠져듭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죠.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남편 필립, 아버지 조지 6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할머니 테크의 메리(Mary of Teck), 여동생 마가렛, 마가렛과 사랑에 빠진 피터 타운센드 대령 등 왕실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연을 갖고 있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드라마는 인물 얼굴 클로즈업을 적절히 활용해 섬세하게 이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시즌 1의 총 제작비는 1억 파운드입니다. 한화로 1500억원 가량으로 회당 150억원을 쓴 셈입니다. 한국 드라마의 회당 평균 제작비가 1~2억원 가량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알 수 있죠. 캐스팅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이 많은 돈의 대부분은 세트를 짓고 시대상황 고증하는데 투입됐습니다.
버킹엄 궁전 내부에 걸린 명화, 필립 공이 수만 파운드를 들여 새로 지은 클레어런스 하우스, 엘리자베스가 입은 화려한 의상과 진주목걸이, 아프리카 순방 중에 묵은 숙소,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2세가 썼던 빨간색 서류함, 오리사냥터, 처칠의 다우닝가 10번지 등 드라마는 디테일에 정성스럽게 공을 들였습니다.
2.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왕이라는 권력
<더 크라운>이 많은 제작비를 들여서 꼼꼼하게 고증하고, 섬세한 연출력으로 인물의 심리 묘사에 주력한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눈길을 확 잡아끄는 드라마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누군가를 죽이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등의 극적인 서사는 이 드라마에 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소재는 참으로 밋밋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들입니다.
- 엘리자베스의 두 아이 찰스와 앤이 남편의 성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왕실과 내각이 대립한다.
- 테크의 메리가 세 명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동시에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를 설교한다.
- 안개로 인한 재난이 끊이지 않자 필립의 삼촌이 엘리자베스에게 처칠을 불러 사임을 권고하라고 말한다.
- 엘리자베스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을 거부당한다.
- 엘리자베스는 여동생 마가렛을 이혼남 타운센드와 떼어놓는다.
물론 전부 중요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찰스의 성이 윈저가 아닌 마운트배튼이었다면 그를 과연 엘리자베스를 이을 영국 왕실의 후계자로 인정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처칠에게 사임을 권고하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빅토리아 여왕 이후 유지되온 왕실과 내각의 관계가 재설정되게 되고요. 만약 그렇게 되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왕실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되겠죠. 마가렛이 이혼남과 결혼할 수 없는 이유도 철저히 왕권 안정을 위해서입니다. 시대는 평등을 요구하고 있고, 왕실은 살아남기 위해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됐던 것이죠.
이렇게 내막을 알고 보면 흥미진진하지만 막상 영상으로 만들기엔 밋밋한 소재들이 드라마를 끌고 갑니다. 드라마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캐나다, 호주 등 영국 연방 총 1억 6천만명을 거느린 왕으로서 권력을 가졌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권력자가 쓴 왕관의 무게란 얼마나 무거운가.
4회에 엘리자베스는 할머니 메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왕이란 자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자리야.
누구를 지지한다는 표현을 해서는 안 되고, 쓸데없는 미소를 지어서도 안 되지.
누군가의 편으로 보일 정도로 오해받을 짓을 해선 안 돼.”
통치할 수 없게 된 뒤 왕실은 그저 의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이 있지만 현대의 왕은 사실상 의전의 노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영예로운 자리처럼 보입니다만 자유는 없고 격식과 왕실의 법도에 갇혀 살아야만 합니다. 오로지 1000년 이상 이어져온 영국 왕실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죽은 권력인 것이죠.
드라마에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2세가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이 일을 떠맡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숙명처럼 받아들여졌다고 말하지요. 엘리자베스는 왕위를 포기한 삼촌 에드워드에게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기도 합니다. 여왕, 공주 하면 동화같은 세상에 살 것 같지만 현실은 항상 겉보기와 다른 법입니다.
여왕보다 더 자유가 없는 사람은 여왕의 남편입니다. 필립 공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옥입니다. 그는 해군 장교였지만 강제 퇴위하고, 공들여 꾸민 집이 아닌 궁궐로 강제 이사하며, 자식에게 성을 물려주지도 못합니다. 여왕의 호위에서도 뒤로 밀리고 새로운 취미로 파일럿이 되어보려 하지만 처칠 총리가 완강히 반대합니다. 거의 트로피처럼 장식장에 갇혀 살아야 하는 박제된 인생입니다.
하지만 필립은 왕족의 위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족은 혁명이 일어난 그리스에서 쫓겨나듯 영국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었죠. 필립은 엘리자베스에게 시대가 변했으니 대관식을 TV 중계해 시민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영국의 왕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것은 18세기말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확립된 원칙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가의 재산을 시민에게 개방해 오랫동안 왕실을 지킬 수 있었고요. 어쨌거나 영국은 팽창했고 더불어 영국 왕도 권세를 누렸지만 20세기초 영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부터는 왕실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조지 5세와 조지 6세 시대에는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요. 특히 조지 6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왕과 황제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합니다. <킹스 스피치>의 말더듬이 왕으로 유명한 그는 왕좌에 오르기 전 노동자들을 위한 권리에 힘쓰는 등 국민에게 다가가려 노력한 덕분에 존경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역시 검소한 생활과 정치에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 위기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연설로 아버지의 치세를 이어갑니다. 아마 영국의 왕들이 조선 왕실처럼 역사적 책무를 외면했다면 영국은 진작 왕실을 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3.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연기
실존 인물을 다루는 사극이니만큼 캐스팅 역시 실제 인물과 닮은 배우를 캐스팅했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할에 연기력을 갖췄으면서도 얼굴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가 아닌 배우를 캐스팅해 참신한 느낌입니다.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클레어 포이는 1984년생으로 영국에선 찰스 디킨스 소설 원작 BBC 미니시리즈 <리틀 도리트>(2008)로 이름을 알린 배우입니다. 깊게 고민하면서 짧게 말하는 순간의 표정이 정말 군주처럼 보입니다.
필립 역의 맷 스미스 역시 영국 출신 배우로 1982년생입니다. BBC의 간판 SF <닥터 후> 시리즈의 11번째 닥터로 캐스팅돼 이미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내의 남편으로 살면서 온갖 하지 말아야 하는 리스트 속에서 답답해 하는 청춘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가렛 역의 바네사 커비는 1988년생입니다. 그녀의 전작은 BBC 드라마 <위대한 유산>(2011)의 에스텔라, 영화 <어바웃 타임>(2013)의 조안나 역할이었습니다. 에스텔라와 조안나 역시 웬지 마가렛과 닮았네요. 궁전에서 타운센드 대령과 몰래 사랑을 키워가다가 좌절하는 모습이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윈스턴 처칠 역의 존 리스고우는 다수의 연극과 영화, 드라마로 경력을 쌓아온 관록의 대배우죠. 영화 <애정의 조건>(1983) <환상특급>(1983) <레이징 케인>(1992) <클리프행어>(1994), 시트콤 <써드 록 프럼 더 선>(1996) 드라마 <덱스터>(2010) 등 출연작 일부만 살펴봐도 연기의 폭이 놀랍기만 합니다. <더 크라운>에서도 혹시 처칠이 환생한 것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조지 6세 역할은 자레드 해리스가 맡았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2011) <링컨>(2012) <얼라이드>(2016) 등에서 볼 수 있는 배우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자상한 아버지로서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실제 조지 6세는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어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고 하죠.
이 드라마를 기획하고 극본을 쓴 사람의 이름도 알아둬야 합니다. 사극을 주로 써온 피터 모건입니다. 그는 2008년 텔레그라프가 선정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인 중 28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다이애나비 죽음과 왕실을 그린 영화 <더 퀸>(2006), 몰락한 대통령 닉슨과 방송인 프로스트의 대담을 그린 연극 <프로스트/닉슨>(2006), 1974년 축구팀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이 된 브라이언 클로프 이야기 <댐드 유나이티드>(2009), 1976년 두 F1 레이서의 F1 대결을 그린 <러시: 더 라이벌>(2013) 등이 그의 작품입니다. 모건은 <더 크라운>을 집필 과정에 왕실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둬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고 하네요.
<빌리 엘리어트>(2000)의 스티븐 달드리가 총감독을 맡고, 필립 마틴, 줄리안 제럴드, 벤자민 캐론 등이 연출했습니다. 특히 스티븐 달드리가 직접 연출한 1,2편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고, 늙어버린 처칠이 초상화를 불태우는 9편의 울림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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