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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6회에서는 동양과 아프리카 출신 여성감독을 살펴보겠습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미국과 홍콩을 오가며 영화를 만든 에스더 엉, 일본의 여성감독 다나카 기누요, 세네갈인으로 아프리카 사상 최초의 장편 상업영화를 만든 사피 파예입니다.
16. 에스더 엉
배우 마리안 쿠온과 텅 푸이 사이에서 연기지도하는 에스더 엉.
중국계 미국인 에스터 엉은 미국에서 중국어로 영화를 만든 최초의 여성감독입니다. 그녀는 1970년 55세에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미국에서 4편, 홍콩에서 5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에스더 엉이 태어나 자란 샌프란시스코에는 중국어 공연을 하는 극장이 있었고 가끔 최고의 중국인 배우가 찾아와 공연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들의 공연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녀가 19세 되던 해, 그녀의 아버지는 영화 프로덕션을 차립니다. 그녀 역시 아버지 밑에서 일하며 영화 일을 익힙니다. 그녀가 아버지의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들 대부분은 현재는 유실돼 볼 수 없는데 두 작품만이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골든 게이트 걸>과 <뉴욕 차이나타운의 살인>입니다.
그녀가 크레딧에 처음 이름을 올린 영화는 <두통>(1936)이라는 작품입니다. <두통>은 중국계 미국인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로 8일 동안 할리우드에서 촬영했습니다. 1936년 이 영화는 홍콩에서 <철혈>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에스더 엉은 영화의 주연 여배우와 함께 홍콩으로 가서 시사회에 참석합니다.
이 때의 경험은 그녀가 중국인으로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그녀는 <국가적 영웅>(1937)이라는 애국심 고취 영화를 찍습니다. 중국의 여성 파일럿이 주인공으로 전쟁 참여를 고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홍콩에 머물면서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듭니다. <1000명의 연인들>, <질투의 폭풍>으로 모두 1938년 개봉했습니다. 이후 1939년에는 직업이 다른 36명의 여성들만 출연하는 영화 <여자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영화의 소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가 에스더 엉에게는 스스로 페미니즘을 자각하는 시기였습니다.
1939년 에스더 엉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중부와 남부 미국에 중국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중국의 뛰어난 영화를 미국에 공급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와 함께 감독 일도 놓지 않았는데 1941년에는 <골든 게이트 걸>을 만듭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광동어 오페라 가수가 주연한 <블루 제이드>(1947)와 <너무 늦은 봄날>(1949)을 만듭니다. 중국인 소녀와 중국계 미국인 소녀의 우정에 관한 영화입니다. 또 그녀는 혼혈 여성과 중국인 선원의 로맨스를 그린 <매드 파이어 매드 러브>를 하와이 배경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 당시 그녀의 영화들은 소수계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로맨스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50년 들어 그녀는 영화감독을 그만두고 중국인 배우 보보와 함께 뉴욕에서 식당 경영에 뛰어듭니다. 그녀는 식당 이름을 'Bo Bo'라고 짓는데 이는 뉴욕에 그녀가 차린 다섯 개의 식당 중 첫 번째입니다.
에스더 엉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그녀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중국 오페라에서 동성애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중국계라는 것을 더 빨리 자각하고 중국에 동화되려 했는지 모릅니다.
2013년 홍콩영화제는 에스더 엉에 관한 다큐멘터리 <골든 게이트 실버 라이트>를 상영하며 그녀를 기렸습니다. 루이사 웨이가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1928~1948년 사이에 촬영된 그녀의 사진들이 2006년에 새롭게 발견되면서 기획된 것입니다.
17. 다나카 기누요
1909년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태어난 다나카 기누요는 배우이자 감독으로 50년 넘게 활동하며 250여편의 영화에 출연 혹은 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의 뮤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직접 자신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5세 때인 1924년 쇼치쿠 스튜디오 영화 <겐로쿠 시대의 하녀>에 출연하며 영화 경력을 시작합니다. 이후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영화에 여러 편 출연했는데 20세 때인 1929년에는 아예 그와 결혼까지 해버립니다. 두 사람은 거의 반년 만에 이혼했습니다만 전남편이 된 시미즈는 다나카를 계속 캐스팅했습니다.
1929년 다나카는 오즈 야스지로의 <졸업해 봤지만...>에서 주연을 맡습니다. 연이어 일본의 첫 유성영화 <이웃의 아내와 나>(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에도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1930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영화 <기누요 스토리>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기누요 시리즈는 1937년 <닥터 기누요>, 1940년 <기누요의 첫사랑>으로 계속됩니다.
1938년에는 노무라 히로마사의 <폭풍의 꽃>에 출연하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전쟁 이전 최고의 흥행기록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다나카는 전쟁이 끝난 뒤 쇼치쿠 스튜디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다양한 감독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합니다.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 작품에 연이어 발탁됩니다. 특히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나라야마 부시코>로는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오하루의 일생>의 다나카 기누요
다나카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을 만난 것은 1940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첫 작품은 <오사카의 여자>입니다. 이후 다나카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15편에 출연합니다. <오하루의 일생>(1952), <우게츠 이야기>(1953), <산쇼다유>(1954) 등 미조구치의 걸작에는 다나카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난 것은 니카츠 스튜디오가 다나카를 감독으로 고용하면서부터입니다.
다나카는 영화감독이 된 두번째 일본 여성입니다. 최초의 여성 감독은 타즈코 사카네입니다. 다나카의 첫 연출작은 1953년작 <연문>으로 1954년 칸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연문>
1953년~1962년 사이 그녀는 다섯 편의 영화를 더 만듭니다. 그녀의 주위엔 대가들이 있었고 그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습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각본을 쓴 <달이 떠오른다>(1955), 마치코 쿄 주연으로 이치가와 콘의 아내가 각본을 쓴 <방황하는 공주>(1960) 등이 다나카가 연출한 대표작들입니다.
말년의 그녀는 연출보다는 다시 연기로 돌아갔습니다. 1975년 그녀는 쿠마이 케이의 <산다칸 No.8>에서 나이 든 창녀 역할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오랜만에 실력을 과시합니다. 그녀는 1977년 뇌종양으로 사망했습니다.
18. 사피 파예
세네갈의 영화감독이자 민족학자인 사피 파예는 1943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여성 중 최초로 상업영화를 만든 감독입니다. 1972년부터 세네갈의 도시를 배경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만들었고 현재도 만들고 있습니다.
파예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 때 다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 1966년 흑인예술 다카르 축제에서 프랑스 민속학자이자 영화감독인 장 루슈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진로를 변경합니다. 루슈는 파예에게 영화가 민속지학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1971년 <작은 것 속의 작은 것>에 출연하는 것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합니다. 프랑스로 간 파예는 민속학을 공부하고 뤼미에르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배웁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모델, 연기, 음향효과를 담당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파예는 루슈의 영화를 싫어했지만 그를 통해 영화만들기와 '시네마베리테'를 배웠습니다. 시네마베리테는 지가 베르토프 이론에 기초해 장 루슈가 발명한 영화사조로 현실을 감춘 장막을 걷어내고 카메라 속에 진실만을 담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관찰형식의 다큐멘터리가 주를 이룹니다.
1979년~1980년 사이 파예는 베를린에서 비디오 프로덕션을 공부했고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공부를 계속해 1979년 파리대학에서 민속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8년 소르본느에선 또다른 민속학 학위를 받습니다.
파예의 첫 번째 영화는 <통행인>(1972)라는 단편입니다. 파리에서 외국 여성으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입니다. 파예가 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식입니다.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네마베리떼 형식의 영화입니다.
<모산>(1996)
이후 그녀는 장편영화를 찍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1975년작 <소작농의 목소리>(혹은 <고향으로부터 온 편지>)로 프랑스 문화협력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여성으로는 최초로 만든 장편 상업영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세네갈에서는 상영 금지됩니다. 그러나 1976년 이 영화는 비평가협회 FIPRESCI 상을 수상하며 존재감을 알립니다.
파예가 만든 영화들은 주로 아프리카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1983년 다큐멘터리 <셀베: 많은 사람 중 하나>에는 남편이 일을 찾아 떠난 뒤 홀로 8명의 아이를 키우는 39살 여성 셀베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셀베는 카메라 밖의 파예와 수시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삶과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묘사합니다.
현재 파예는 파리에 살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영화들은 정작 아프리카에서보다는 유럽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 기억해둘 여성 영화감독 20인 (7) 클레르 드니, 아녜스 바르다
참고 사이트:
Esther Eng Women Film Pioneers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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