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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버드맨>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즈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입니다. 대성공을 거둔 감독들은 다음 영화로 평소 하고 싶었지만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슴 속에 숨겨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영화 역시 이냐리투 감독이 5년 전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영화는 19세기 사냥꾼 휴 글래스가 혹한기 대자연 속에서 4000km를 걷는 사투 끝에 살아남은 실화를 156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추적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 글래스는 곰을 만나 격투를 벌이다가 사지가 찢기는 큰 부상을 당합니다. 글래스를 험지의 길잡이로 써왔던 미군들은 그를 놓고가는 대신 대원 두 명을 남겨놓고 그가 사망하면 장례를 치러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대원 중 한 명인 존 피츠제럴드에게 그것은 쓸데없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어차피 죽을텐데 굳이 위험을 무릎쓰고 그를 돌봐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글래스를 파묻고 떠납니다. 거의 죽은 자인 글래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생존과의 악전고투를 벌입니다.
영화는 장대합니다. 스토리보다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가 두드러집니다.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츠키는 <그래비티>, <버드맨>에 이어 이번에도 황홀한 솜씨를 보여줍니다. 앞선 두 영화가 원테이크로 공간을 유영하는 느낌을 줬다면, 이 영화는 광활한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갇혀 있는 듯한 고립감을 표현합니다. 눈보라치는 숲속에 갇힌 인물들의 공포감이 객석에 그대로 전달됩니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곰이 글래스를 습격하는 장면입니다. CG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실적인 곰은 글래스를 발로 짓밟고 살갗을 찢어버립니다. 카메라는 거의 원테이크로 곰과 글래스의 사투를 담아내는데 이 장면에서 글래스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가 빛을 발합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대호>에도 CG로 만든 호랑이가 등장했지요. 꽤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레버넌트>의 곰을 보고 나면 <대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대호>의 호랑이는 <쥬라기공원>, <고질라> 등 괴수영화 속 괴물들처럼 익숙하게 움직인 반면, <레버넌트>의 곰은 실제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자유롭습니다. 즉, <대호>가 호랑이를 진부한 클리셰 속에 가두었다면, <레버넌트>의 곰은 야생에서 찍어온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합니다.
"폭풍이 몰아칠 때 깊이 뿌리내린 나무는 쓰러지지 않아요."
영화는 2시간 3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글래스가 눈보라 치는 숲을 걷는 장면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는 산을 걸으며 누군가 남기고 간 동물의 뼈를 발라먹고, 냇가에선 물고기를 잡아 먹습니다. 또 그와 비슷한 처지의 인디언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강간당하는 여자를 구해주기도 합니다.
이 장면들이 1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이유는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한 인간의 사투 말입니다. 그것은 흔한 수사여구처럼 위대하거나 숭고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짐승이 하는 것처럼 단순한 행동의 연속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더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폭풍을 견디듯 끊임없이 살기 위해 걸어본 사람만이 쓰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글래스가 만난 한 인디언은 이와 같은 글을 남기고 죽은 채 발견되는데요. 이는 결국 글래스가 생존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이제 연기 이야기를 해봅시다. 글래스를 연기한 디카프리오와 그가 쫓는 피츠제럴드를 연기한 톰 하디. 둘 다 굉장한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진가는 두 사람이 맞부딪힐 때가 아닌 단독으로 있을 때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결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외로 싱겁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원한 것은 복수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복수극의 결말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겠죠.)
글래스는 오직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연과 사투를 벌이고, 피츠제럴드는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인간들을 배신합니다. 처절하게 생존한다는 점은 같지만 목적이 다른 두 인물은 눈빛부터 다릅니다. 절대 눈을 깜박이지 않으려는 글래스의 눈빛에는 잔뜩 독이 올라 있는 반면,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한다"는 피츠제럴드의 눈빛에는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화면에 꽉 차는 두 사람의 표정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디카프리오는 괜찮은 연기를 하지만 오스카 트로피와 인연이 없는 배우로 곧잘 놀림감이 되곤 합니다. <레버넌트>로 그는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어 다시 한 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과연 이번에는 수상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은 개고생하는 배역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올해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디 레드메인은 희귀병에 걸린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을 연기했고, 작년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에이즈 환자를 연기한 매튜 매커너히가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레버넌트>의 글래스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폰지 사기꾼 조던보다는 확실히 힘들어 보이는 배역입니다.
<레버넌트>에서 곰에게 짓밟히고, 물고기 잡아먹고, 내장을 파낸 말 가죽 속에 들어가고, 추위에 덜덜 떨며 고난의 행군을 하는 디카프리오의 모습은 아마도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굳게 닫혔던 마음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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