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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라센의 '모비딕'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향유고래를 잡으러 떠난 주인공은 왜 그 고생을 하러 바다로 나갔을까요?
답은 빛에 있습니다. 향유고래의 거대한 머릿속에는 끈적한 하얀 물질이 있었는데 이는 18세기 전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끈적하고 하얀 물체가 정액과 닮았다고 해서 그 고래기름을 영어로 'spermaceti'라고 불렀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등 당시 명사들에게 경뇌유(고래기름)로 만든 양초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기존 수지양초보다 훨씬 밝고 고약한 냄새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경뇌유가 돈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고래잡이가 횡행해 향유고래들은 멸종 위기에 처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석유의 발견과 전구의 발명이 고래의 멸종을 막았습니다.
이처럼 때로 자연자원은 고갈되기 전 위기를 감지한 인류의 기술적 진보에 의해 보존됩니다.
요즘 원유값이 폭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러시아와 이란의 정치적 패싸움의 결과로 원유값이 폭락했다는 드러난 사실 이면엔 석유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을 미리 간파한 영리한 투자자들이 원유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되어선 안됩니다.
석유는 태양광이나 풍력, 수소 등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보존하기 불편하고 냄새도 나잖아요.
결국 석유는 향유고래처럼 완전히 고갈되지 않고 지구의 지하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The Spermaceti Whale (1831)
19세기 후반에 처음 석유램프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경뇌유를 이용한 양초보다 20배는 더 밝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문 산업도 이때 태동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날이 저물면 잠을 자야 했지만 이젠 밤에도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석유램프는 불꽃을 내며 폭발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석유램프로 인해 해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모든 불편을 한 방에 해소해준 것이 바로 전구였습니다.
전구의 발명으로 인해 인류는 전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듭니다.
요즘도 어떤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표현할 때 '전구'에 불꽃이 튀는 장면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전구=천재'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 것은 그만큼 전구의 발명이 혁신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전구의 발명자는 토마스 에디슨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절반만 맞습니다.
오늘날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의 발명자라고 이야기하면 그건 맞는 이야기일까요?
맞기는 하지만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죠?
그전에도 스마트폰은 존재했지만 거의 '듣보잡'이었는데 아이폰으로 인해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것처럼 에디슨의 전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이 1882년 백열전구를 발표하기 전 1840년대부터 이미 무수히 많은 백열전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은 이를 대중화에 성공시켜서 유명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에디슨은 우리에게 '발명왕'이라는 칭호처럼 막연한 천재로만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그가 무수히 많은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던 배경에는 천재성이 아닌 다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선 토마스 에디슨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4가지로 정리해 살펴보겠습니다.
1. 에디슨은 허세 가득한 홍보의 귀재였다
에디슨은 경쟁자들이 아예 개발에 뛰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공갈제품에 대한 소문을 흘려 겁을 주었습니다. 발표는 됐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제품을 '베이퍼웨어(vaporware)'라고 하는데, 에디슨의 초기 전구 역시 베이퍼웨어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신문사 기자들에게 구두닦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제품을 곧 선보이겠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구의 발명에 이제 막 착수했을 때였죠.
그는 하루는 자신의 혁명적인 전구를 보여주겠다며 기자 한 명을 멘로파크 연구소로 초대했습니다. 당시 그의 전구 시제품은 5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기술 개발 초기였습니다. 하지만 에디슨은 전구를 3~4분 정도 구경하게 둔 뒤 서둘러 기자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갑니다. 기자가 전구가 얼마나 가느냐고 물어보면 에디슨은 "거의 영원히 지속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사기로 지탄을 받을 일이겠지만 에디슨은 허세를 부립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허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후 꼭 마법적인 제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이처럼 허세와 호언장담, 이후 실제 발명에 따른 대중의 찬사와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계속 줄타기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2. 에디슨은 혼자가 아닌 팀으로 일했다
1876년 에디슨은 전신기 특허로 번 돈으로 그가 살던 캘리포니아의 멘로파크에서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그는 연구팀을 결성해 이를 '패거리(mucker)'라고 불렀는데 패거리들의 면면은 화려하고 다양해서 영국인 기계 기술자 찰스 배첼러, 스위스인 기계 제작자 존 크루에시, 미국인 물리학자 프랜시스 업턴 등 10여명에 달했습니다. 이후 에디슨의 발명은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들과 공동작업에 의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며 자랐는데 그 빈틈을 이런 우수한 인재들이 채워주었습니다. 에디슨이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이루어낸 협업방식은 이후 벨 연구소와 제록스파크 같은 민간 연구소의 뿌리가 됩니다.
3. 에디슨은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으로 보상했다
에디슨은 기계나 장비만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명을 위한 보상 시스템도 발명했습니다. 1879년 전구를 개발하고 있던 에디슨은 업턴에게 연봉 대신 에디슨전기회사의 주식 5퍼센트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당시 업턴의 연봉은 600달러였는데 1년 후엔 그가 받은 주식의 가치가 1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폭등하며 거부로 올라섭니다.
에디슨은 창조적인 팀을 만드는 방법을 알았기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놓았으니 당연히 주장이 부딪치며 여러 이야기가 나왔겠죠? 에디슨은 이들에게 실험을 독려합니다. 실패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들이 성공할 때는 돈으로 보상해줬습니다. 다른 곳에서 이미 시작된 아이디어라도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매입해 더 크게 키웠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스타트업을 인수한 것입니다.
실패를 감수하는 직원 독려, 성공에 걸맞는 금전 보상, 발전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 인수 등 에디슨은 19세기 말에 요즘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하는 방식으로 연구소를 운영해 대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이처럼 그는 개발팀을 이끌고 독려하는 데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지만 정작 기업을 경영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몇 개의 벤처를 말아먹었고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물러나야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도 스티브 잡스와 닮았나요? 요즘 말로 하면 에디슨은 탁월한 CTO였지만 CEO로선 미흡했습니다.
4. 에디슨은 스펀지처럼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백열전구부터 축음기, 축전기, 전화송화기, 광석분리기, 발전기, 전력시스템, 주식상장표시기, 영사기, 믹서, 건조기, 전기철도까지 다양합니다. 그가 개인 혹은 공동으로 얻은 특허만 1093개에 달했습니다.
에디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발명에 나보다 앞서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명성에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들의 아이디어다. 나를 정확히 표현한다면 발명가보다 스펀지가 더 어울린다." 그는 스펀지처럼 당대 인재들을 흡수하고, 아이디어를 수용해 더 큰 발명이라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에디슨이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산업을 창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는 기업가 정신]에서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는 자신도 일부 자금을 조달한 바로 그 전력회사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자신의 전구를 사용할 고객에게 전력을 공급하도록 전선을 가설할 권리도 확보했으며, 배전 시스템도 완료해 두었다. 요컨대 에디슨은 산업을 창출했던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에디슨이 백열전구의 발명자로 각인된 계기가 된 사건을 살펴보면 그의 창조 방식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에디슨이 만든 백열전구의 장점은 탄화시킨 대나무를 필라멘트로 사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백금, 셀룰로이드, 대팻밥, 쏘시개나무, 코르크, 아마, 코코넛 털, 조개껍질, 종이 등 다양한 재료로 필라멘트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1년간의 실험 끝에 가장 오래가는 필라멘트의 재료를 대나무에서 찾았습니다. "발명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그의 명언은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죠.
에디슨은 자신이 만든 전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구는 이미 40년 전부터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에디슨의 전구가 성능이 더 좋다고 해도 그것으로 세상이 바뀔 일은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알리기 위해 쇼를 벌입니다.
멋진 프리젠테이션으로 신제품을 알렸던 스티브 잡스처럼 에디슨 역시 멋진 연설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에디슨은 그의 팀을 쿠바, 중국, 일본으로 보내 대나무를 넉넉히 구해왔습니다. 이때 아시아로 건너간 에디슨의 팀은 서양의 제조업이 아시아에서 재료를 조달하게 된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는 전구의 성능을 알리기 위해 맨해튼의 펄 스트리트에 전구를 설치해 거리 전체를 환하게 밝힐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이벤트를 벌이려면 전구 뿐만 아니라 전원, 전류 분배 시스템, 전구 연결망, 전력량계 등 전기에 관한 다양한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작업해온 것들을 집약시켜 하나의 쇼를 펼쳐냈는데 이는 전기산업을 거의 홀로 만들어낸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후 펄 스트리스는 네온 등 조명기술이 새롭게 발명될 때마다 가장 먼저 설치되는 조명기기의 각축장이 됐습니다.
(참고자료: 스티븐 존슨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Wikipedia: Thomas Edison, 토머스 에디슨, 1846: The Year We Hit Peak Sperm Whale O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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