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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전화는 하나의 어플에 불과하게 됐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전만 해도 전화는 신기한 물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책 한 권에 담은 전화번호부는 베스트셀러로 무려 2천만부를 찍기도 했다고 하니 전국 어디서나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헤어진 이산가족 상봉이 전화번호부를 통해 이루어지거나 관심 있는 여성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데 쓰이는 일도 있었는데요.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전화번호부책은 1990년대 114의 등장으로 점점 자취를 감추더니 2008년 발간이 중단되었습니다.
전화번호부책이 발간된 나라는 한국 뿐만은 아닙니다.
옛 프랑스영화를 보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번호부책을 뒤져 전화를 거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무인도로 가게 된다면 전화번호부책을 가져가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다양한 사람의 이름이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소설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게 전국민이 번호 하나씩을 갖게 된 전화는 언제 탄생했을까요?
19세기 후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만들지 않았냐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음성을 먼 거리로 송수신하는 장치로 전화의 개념을 확장하면 그 원리의 발견은 18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두아르레옹 스콧 드 마르탱발
1850년대 파리의 출판업자 에두아르레옹 스콧 드 마르탱발은 해부학책을 보면서 인간의 귀가 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1850년대 이전엔 소리를 그대로 기록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자들은 소리가 보이지 않는 파동의 형태로 공기를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아무도 소리를 기록하는 장치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해부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귀의 기본 구조를 담은 해부도가 등장합니다.
스콧이 본 책도 이때 쓰여진 것이었죠.
스콧은 귀 안쪽의 해부도를 보고 인간의 목소리를 자동으로 기록하는 기기를 구상합니다.
마침내 1857년 스콧은 소리를 녹음하는 기계를 만들어 프랑스에서 특허를 받았습니다.
양피지 막이 설치된 뿔 모양의 장치를 통해 음파를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음파에 양피지가 진동하면 그 진동이 돼지 털로 만든 펜에 전달됐고, 펜이 검은 먹지에 음파를 새겨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스콧은 이 기계의 이름을 '포노토그라프(phonautograph)'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소리를 기록하는 기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스콧 드 마르탱발의 포노토그라프
그러나 이 기계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리를 기록할 수는 있지만 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녹음은 할 수 있지만 재생은 안 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기계가 다 있냐고요?
지금은 녹음기에 재생 버튼이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만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녹음과 재생은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우리가 글을 쓸 때 그것을 어떻게 읽을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죠.
스콧이 애초 생각한 장치는 '속기'처럼 소리의 파동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록한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모스 부호를 해독하는 것처럼 소리의 속기부호를 읽는 법을 따로 배워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스 부호 아시죠?
짧은 전류와 긴 전류를 조합해 알파벳과 숫자를 표기하는 통신 방식으로 미국 발명가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가 1844년 고안했습니다.
스콧은 모스 부호를 보며 소리를 기록하고 해독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긴 합니다.
녹음은 할 수 있되 들을 수 없는 녹음기라니, 이걸 과연 누가 살까요?
훗날 역사학자들은 스콧이 초기에 녹음한 포노토그라프를 찾아내 재생해봅니다.
파리의 과학아카데미의 데이비드 조반노니와 동료들은 먹지에 새겨진 희미하게 불규칙한 선들을 정밀하게 촬영해 이를 디지털 파형으로 전환해 컴퓨터 스피커로 틀어봤습니다.
과연 어떤 소리가 났을까요?
1850년대에 링컨이 살아있던 시절 실제로 녹음된 소리라니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나요?
그중 1860년 4월에 제작된 녹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 소리는 여자가 노래 부르는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것은 두 배로 재생된 소리였습니다.
소리의 속도를 낮추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치직거리면서 들렸습니다.
바로 녹음기를 처음 발명한 남자, 스콧 자신의 목소리였습니다.
스콧 드 마르탱발의 기괴한 목소리를 직접 한 번 들어보세요.
전화기를 송화기와 수화기로 나눈다면, 송화기의 기능, 즉 '녹음'이 가능해졌으니 다음은 수화기의 기능, 즉 '재생'이 탄생할 차례입니다.
재생을 처음 생각한 사람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입니다.
하지만 벨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벨과 토마스 에디슨은 거의 동시에 재생기를 발명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애초 구상한 방식은 극과 극으로 전혀 달랐습니다.
1876년 벨은 세계 최초의 전화기를 만들었지만 이것이 개인과 개인 통신 수단이 아니라 생음악을 함께 듣는 수단으로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1877년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은 이것이 음성 편지를 보내는 수단으로 사용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전화기와 축음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이후 두 개의 위대한 기기는 정확히 반대의 운명으로 진화했습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토마스 에디슨과 축음기
전화는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우선 '여보세요(Hello)' 라는 단어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여보세요'는 '여기보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1960년대 서울말인 '~세요'체가 덧붙여져 '여보세요'가 됐습니다.
한반도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건 1896년이었는데 그때 궁궐에서 송화기에 대고 처음으로 한 말이 '여기보오'였다고 하네요.
'Hello'는 녹음기를 실험하던 에디슨이 마이크에 대고 외친 말이라고 하죠.
지금은 둘다 전화기에 대고 처음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또, 전화기의 탄생은 고층 건물의 건설에 불을 지폈습니다.
전화가 없었다면 고층 건물은 지금처럼 활발하게 지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 층마다 사람들이 직접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죠.
지금도 고층건물엔 내선번호가 달린 전화기가 각 층을 효과적으로 연결해줍니다.
옛날 미국 영화를 보면 열심히 전화를 연결해주는 전화교환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여성이죠.
이처럼 전화의 발명은 여성이 사회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의 한 장면.
북미와 유럽을 연결시켜준 것도 전화였습니다.
1956년 스코틀랜드와 캐나다 뉴펀들랜드를 잇는 대서양 횡단 동축케이블이 해저를 가로질러 연결됨으로써 북미와 유럽간 전화통화 시대가 열립니다.
해저케이블이 개통된 뒤 얼마되지 않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가 핵전쟁 위험에 처했는데 미국과 소련은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간에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합니다.
핫 라인은 응급을 뜻하는 빨간색 전화기여서 '레드 폰(red phone)'이라고 불렸는데요.
그러나 백악관과 크렘린을 연결하는 레드 폰은 음성 통신이 아니었습니다.
단어 하나가 핵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음성 전화는 부적절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핫라인은 텔레타이프(teletype)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이었습니다.
1963년 8월 30일 백악관-크렘린의 핫라인은 전화가 아닌 텔레그래프였다.
20세기 전화가 해낸 큰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거의 모든 것들의 발명기지인 '벨 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1880년 스코틀랜드인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볼타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상금이 5만프랑(현재 돈으로 대략 2억 5천만원 상당)이었는데 그는 이 돈으로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이 연구소가 바로 '아이디어 공장'으로 불린 '벨 연구소'입니다.
분수전하를 가진 준입자를 통해 홀 효과를 증명한 공로로 199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벨 연구소의 슈퇴르머(왼쪽)와 동료들.
벨 연구소는 라디오, 진공관, 트랜지스터, 텔레비전, 태양전지, 동축케이블, 마이크로프로세서, 컴퓨터, UNIX, C언어, CDMA 휴대전화, 섬유광학 등 현대의 거의 모든 기기의 아이디어가 잉태된 곳입니다.
노벨상만 무려 8개를 받았습니다.
[벨 연구소 이야기(The Idea Factory)]라는 책을 쓴 패스트 컴퍼니 편집장 존 거트너는 20세기의 거의 모든 것을 발명한 벨 연구소의 비결을 파헤쳐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분야의 유능한 연구원, 실패에 대한 관용, 원대한 목표에 대한 도전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벨 연구소가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또 그로 인해 칭송받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연구소가 그토록 위대한 발명들을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벨 연구소의 모기업이었던 AT&T의 탄생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885년 설립 당시 AT&T 로고와 현재 로고.
1885년 벨은 뉴욕에서 AT&T를 설립합니다.
미국 최초의 전화회사이자 1970년대 반독점소송에서 패소해 해체되기 전까지 거의 100년 간 독점적으로 미국에서 전화 사업을 영위하던 기업입니다.
전화 사업이 성장하면서 1913년 미국 정부는 AT&T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AT&T와 미국 정부는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는데 그때마다 AT&T의 논리는 "아날로그 전화망이 너무 복잡해 후발 경쟁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없고, 고품질을 위해선 하나의 기업이 전화망을 운영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을 독점하려는 기업은 품질 저하로 결국 소비자만 피해를 볼 거라는 논리를 드는데 AT&T는 그 시조였던 셈이네요.
미국 정부는 AT&T가 너무 커지는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경쟁사를 키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전화망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기에 경쟁 기업이 섣불리 투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1962년에 발사된 벨 연구소의 Telstar 1 통신 위성.
결국 1956년 미국 정부와 AT&T는 대타협에 이릅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독점 승인 타협입니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조건은 벨 연구소의 모든 발명을 미국 기업이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미국 정부는 벨 연구소의 가치를 높게 보고 있었던 것이죠.
예컨대, 지금 구글이 하고 있는 모든 연구를 무료로 공개하는 대신 구글에게 검색 독점 사업권을 주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필시 다른 기업들이 반발했겠지요?
하지만 미국 정부는 AT&T의 독점을 눈감아주는 대신 벨 연구소의 수많은 특허를 미국 제조업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는 길을 택합니다.
이 대타협으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발명 특허들이 대거 무상으로 풀립니다.
그 덕분에 컴퓨터, 휴대전화, 트랜지스터 등 첨단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미국이 유럽을 추월해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인들은 AT&T에 전화요금을 고정적으로 바치는 대가로 새롭고 혁신적인 발명품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PS)
1974년 미국 법무부는 AT&T에 반독점 소송을 제기하고 1982년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1984년 AT&T는 7개의 회사로 쪼개집니다.
1996년 AT&T는 벨 연구소를 분사시켜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자회사로 만들었습니다.
2005년엔 한국인 김종훈 박사(미래창조과학부장관 지못미)가 벨 연구소의 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6년엔 루슨트가 알카텔과 합병하면서 현재 벨 연구소는 알카텔루슨트의 자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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