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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듀오, 둘이서 함께 만들면 더 좋다 (1)
"오랜 친구들이 주는 축복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 일 때 바보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 랄프 월도 에머슨
혼자 만드는 것보다 둘이 하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혼자서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없었을 갈등이 둘이 모이면 생긴다는 것이죠.
두 사람만 모여도 그곳은 작은 사회입니다.
사회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요.
기업에서도 혁신을 일으키는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이 있습니다.
그것은 리더십의 차이기도 하고 문화의 차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만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업이든 어떤 조직이든 인사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겠죠.
세상엔 화학적 결합을 일으키는 파트너가 존재합니다.
도저히 불꽃이 튀지 않는 두 사람을 단순히 모아놓는다고 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지는 않습니다.
시너지를 일으키는 파트너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사람. 그 사람은 형제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결혼생활 자체가 ‘유레카’의 연속이겠죠.
그래서 듀엣 창작자들을 유형별로 모아봤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창작에 빠져들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1. 용감한 형제들
오빌(왼쪽), 윌버(오른쪽) 라이트 형제
윌버 라이트 & 오빌 라이트
장난감 헬리콥터에 꽂힌 벤처 창업가
윌버는 1867년생, 오빌은 1871년생입니다.
두 형제는 7남매 중 셋째와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넷째와 다섯째는 쌍둥이인데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네요.)
윌버와 오빌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창업과 비행기 개발에 매진했습니다.
두 형제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1878년 주교인 아빠가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헬리콥터 장난감을 사왔습니다.
헬리콥터 장난감은 프랑스의 비행 개척자 알폰스 페노의 발명품으로 종이, 대나무, 고무줄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두 형제는 그 장난감이 고장날 때까지 가지고 놀았고 망가지고난 뒤에는 똑같이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두 사람은 그때가 비행에 대해 스파크가 튀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두 형제는 청년 시절엔 신문을 창간하고 자전거 상점을 오픈하는 등 창업에 나섰습니다.
20세기 초는 지금 만큼이나 온갖 혁신적인 발명이 쏟아지던 시기였기에 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렇게 호기심 많은 형제들이니 그들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분명 스타트업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두 형제는 모두 고등학교를 자퇴합니다.
그리고 1889년 신문 발간과 인쇄사업을 시작합니다.
지금이야 신문과 인쇄업이 사양 산업이지만 그 당시엔 그야말로 ‘핫 아이템’이었죠.
요즘으로 비교하면 모바일 뉴스 플랫폼을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윌버의 도움으로 오빌은 인쇄기를 디자인하고 두 사람은 프린트 숍을 창업합니다.
마침내 그해 3월 주간 신문 '웨스트 사이드 뉴스'를 창간합니다.
오빌이 발행인, 윌버가 편집인이었습니다.
1890년 4월 두 사람은 신문을 일간지 체제로 바꿨습니다.
제호도 'The Evening Item'으로 변경합니다.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죠.
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쓰라린 실패를 맛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디어 산업이라는 게 절대 만만하지 않잖아요.
결국 4개월 만에 폐간합니다.
이후 신문 발간은 접고 인쇄에만 집중해 흑인 시인 친구가 편집인으로 있던 주간신문 'Dayton Tattler'를 인쇄해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꿈은 대체 언제 실현되는 걸까요?
조금만 인내심을 갖고 두 형제의 스타트업 도전기를 계속 살펴보지요.
요즘에도 페북 나오고 드론 나왔지, 드론 나오고 페북 나온 건 아니잖아요.
라이트 사이클 컴퍼니
비행기 이전에 자전거가 있었습니다.
1890년대 미국 시카고 일대에 자전거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 볼 리 없는 형제는 1892년 자전거 수리 및 판매 상점을 오픈합니다.
가게 이름은 'Wright Cycle Exchange'였는데 후엔 'Wright Cycle Company'로 개명하죠.
그들은 자체 브랜드의 자전거를 생산했습니다.
그렇게 한창 자전거에 빠져있을 때 그들은 어떤 신문 혹은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됩니다.
독일의 오토 리리엔탈이 만든 글라이드 사진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그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확 꽂혔습니다.
그래서 글라이더라는 게 대체 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비행기 개발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 드론 열풍과 닮았다고 할까요?
1896년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사뮤엘 랭글리가 무인 스팀파워 고정날개 비행에 성공합니다.
시카고 엔지니어 옥타브 샤누트는 미시간 호수 인근 모래사막에서 글라이더들을 데려와 대대적인 테스트 비행을 합니다.
불운의 사고도 있었습니다.
1896년 8월 독일의 리리엔탈이 글라이더 사고로 추락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도 라이트 형제의 호기심을 막지 못합니다.
1899년 윌버는 스미소니언 연구소에 비행기에 관한 자료와 출판물을 요청하는 편지를 씁니다.
조지 케이리, 샤누트, 리리엔탈, 랭글리,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을 받아들고서 두 형제는 그해부터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라이트 형제의 전설적인 비행기 개발이 시작된 것입니다.
윌버(왼쪽), 오빌(오른쪽) 라이트 형제
그들은 최초의 비행기 연구자는 아닙니다.
유럽의 글라이더 연구자들에 비하면 수십 년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초의 비행기 개발자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다른 연구자들이 무모하게 비행 테스트하다가 죽고, 포기할 때 끝까지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4년 후인 1903년 라이트 형제는 최초의 비행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1905~1907년 사이엔 비행기를 계속 발전시켜 날개가 고정된 최초의 비행기를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라이트 형제는 단번에 비행기를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해나가다가 마침내 장기 비행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에도 '버전 업'이라는 이름으로 응용되고 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개발 방식은 '버전 업' 개발의 시초입니다.
두 형제는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다른 주로 이사 가서 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1994년 해당 고등학교는 윌버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합니다.
1885년 윌버는 아이스케이트를 하다가 하키 스틱으로 얼굴을 맞아 앞니가 빠집니다.
그때까지 예일대에 진학해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그 사건 이후 운동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는 집에서 병든 엄마를 보살피며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윌버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것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조엘(왼쪽), 에단(오른쪽) 코엔 형제
조엘 코엔 & 에단 코엔
영화 뿐만 아니라 인생도 닮은 형제
조엘은 1954년생, 에단은 1957년생으로 3살 차이입니다.
조엘과 에단은 어릴 때부터 영화만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조엘은 용돈을 아껴서 '비비타 슈퍼 8미리' 카메라를 샀습니다.
형제는 동네 친구를 주인공으로 TV에서 본 영화를 따라 만들면서 영화와 친숙해졌습니다.
코엔 형제는 유대인입니다.
조엘은 "어릴적 유대인식 교육이 세상을 보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 적 있는데요.
유대인식 교육방식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시리어스맨>입니다.
형제는 같은 고등학교와 같은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조엘은 1973년에 에단은 1976년에 세인 루이스 파크 고등학교를 나란히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주의 그레이트 배링턴에 있는 바드 칼리지에 입학합니다.
이후 조엘은 뉴욕대 대학원에서 영화 프로그램을 4년 동안 공부했고, 에단은 프린스턴대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논문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었습니다.
조엘(왼쪽), 에단(오른쪽) 코엔 형제
조엘은 1984년 여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결혼했고 파라과이에서 아들을 입양했습니다.
맥도먼드는 6편의 코엔형제 영화에 출연했고, <파르고>로 오스카를 받았죠.
에단은 필름편집자 트리시아 쿡과 결혼해 1남1녀를 뒀습니다.
조엘 부부와 에단 부부는 모두 뉴욕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함께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도 샴쌍둥이처럼 참 닮은 형제 감독입니다.
라나 워쇼스키 & 앤디 워쇼스키
건축 사업을 하며 짜투리 시간에 만화를 그리다
라나는 1965년생으로 원래 이름은 래리입니다. 앤드루 폴 앤디 워쇼스키는 1967년생입니다.
두 사람 모두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간호사이자 화가였고 아빠는 폴란드 출신 사업가였습니다.
태어날 때 두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동생 줄리와 로라도 있었죠. 줄리는 현재도 소설가이자 각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워쇼스키 형제’인지 ‘워쇼스키 남매’인지 헷갈리시죠?
두 사람은 이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워쇼스키들(Wachowskis)'입니다.
라나와 앤디는 켈로그 초등학교, 휘트니 영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이후 라나는 뉴욕의 바드 칼리지로 진학했고, 앤디는 보스턴의 에머슨 칼리지로 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대학을 중퇴하고 시카고에서 창업을 합니다.
뜻밖에도 두 사람이 선택한 창업 아이템은 주택 페인트와 건축 사업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그들은 마블 코믹스를 위한 만화를 그렸습니다.
두 사람은 취향이 같았습니다.
히치코크, 존 휴스턴, 빌리 와일더, 로만 폴란스키, 코폴라, 로저 코만, 코엔 형제, 오우삼, 구로사와 아키라, 오시이 마모루, 리들리 스코트, 조지 루카스, 프리츠 랑, 스탠리 큐브릭을 좋아했고, 소설가 헤르만 헤세, 호머, 도스토예프스키, 철학자 코넬 웨스트, 켄 윌버에게 영향받았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마블 코믹스 레이저라인의 임프린트 '엑토키드'에 들어갈 만화를 그렸습니다.
'엑토키드'는 1993년 <헬레이저> <나이트브리드>로 유명해진 호러 소설가 클라이브 바커가 창간한 잡지입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그들은 본격적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시나리오가 <암살>이었고, 워너브라더스는 1994년 이를 브라이언 헬겔란드에게 맡겨 영화로 만듭니다. 훗날 라나와 앤디는 이 영화에서 그들의 이름을 빼기를 바랬을 정도로 영화는 브라이언 헬겔란드에 의해 많이 수정됐다고 합니다.
라나와 앤디의 감독 데뷔작은 1996년 네오 느와르 스릴러 <바운드>였습니다.
스타일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동성애를 다룬 첫번째 메인스트림 영화로 기록됐습니다.
이 영화 덕분에 두 사람은 다음 영화로 기념비적인 <매트릭스>를 만들자고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라나가 되기 전 래리(왼쪽), 앤디(오른쪽) 워쇼스키
래리는 언제부터 라나가 됐을까요?
<매트릭스 리로디드> 개봉 이후 래리가 여장을 하고 나타난 파티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래리는 성전환을 하고 라나로 이름을 바꿀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묵묵부답이던 라나는 2008년 <스피드 레이서> 개봉 이후 성전환 수술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당시 루머에 대해 해명하지 않은 이유가 대중 앞에서 소심해지는 성격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2010년 10월 라나는 인권캠페인 상을 받았는데요. 그녀는 수상소감에서 성 정체성 혼란으로 자살하려고까지 했던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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