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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금지되고 살인자는 처벌받는다.
트럼펫 소리에 맞춰 대량학살하지 않는 한."
- 볼테르
영화 속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죽는 장면을 보여주는 과거 영상도 없다. 그런데 자꾸만 상상을 하게 된다. 상상을 계속 하다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학살자라는 사람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보이고, 행동대장은 대역 배우인 것처럼 보인다. 저들이 정말 수백 명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설마.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 설마가 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학살 집행자 안와르 콩고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영화 찍는다며 희희덕거릴 때는 믿기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니 연민의 감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분노하게 된다. 그게 이 다큐멘터리의 독특한 내러티브 방식이다. 진실을 담아야 하는 다큐멘터리가 이래도 되냐고? 250만 명을 학살하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들을 다루면서 이래선 안될 이유는 또 뭔가?
영화를 보고 나면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절망적으로 보일 것이다. 학살자는 떳떳하게 살아가고 희생자의 가족들은 여전히 몸을 사린다. 한국도 비슷하지 않냐고? 반쯤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한국에선 형식적으로나마 학살자에게 벌을 주긴 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선 군사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후 공산주의자 대숙청이 시작됐다. 노조원, 소작농, 지식인, 중국인 등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다. 서방세계가 개입하기 전까지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250만 명이 처형됐다. 군부 세력은 공산주의자를 죽이기 위해 준군사조직과 갱스터를 동원했다. 이들은 칼로, 총으로, 나무 막대기로, 차로 치어서, 목 매달아서, 심지어 철사를 목에 휘감아 닥치는대로 죽였다. 집을 불태우고 돈을 빼앗았다. 그렇게 명령받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공소시효는 이미 지나버렸고 군부 세력은 영화가 만들어진 2012년에도 계속 집권중이다.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지나가고 나면 자카르타 시내의 한 쇼핑센터가 보여진다. 이곳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끔찍한 고통을 안고 있다. 영화의 제작진은 그 고통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희생자가 아닌 학살자들을 찾아간다. 47년이 지난 지금 당시 살인을 자행하던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을까? 희생자의 가족을 찾아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그러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신이 나서 당시의 학살 과정을 자랑했다. 이 과정을 영화로 재현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학살 집행자 안와르 콩고, 행동대장 헤르만 코토, 북수마트라 주지사 시암술 아리핀, 권력에 충성한 신문 발행인 이브라힘 시니크 등 당시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들이 실명 그대로 출연해 영화 속 영화를 찍기 위한 과정을 모의한다. 영화 속 영화는 안와르 콩고를 주연으로 그가 공산주의자를 처단하는 과정을 할리우드의 고어 영화처럼 그린다.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더 리얼할 거라는 설명과 함께다.
당시 학살에 앞장섰던 준군사조직은 판카실라 청년단이라는 단체다. 판카실라는 공산주의자 학살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인도네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회원 수만 300만 명에 달한다. 판카실라 모임에 부통령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는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판카실라가 자유롭게 폭력을 써가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통령과 차관이라는 사람이 직접 판카실라 청년단을 지휘하니 판카실라의 기세가 등등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 영화에서 안와르 콩고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판카실라 청년단의 리더였던 헤르만 코토는 1965년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공산주의자인 중국인은 죄다 죽였어. 거리에 중국인이 보이면 죄다 칼로 찔렀지. 여자친구가 중국인이었는데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가 칼로 찔러 물에 빠뜨렸어. 중국인이면 보나마나 공산주의자니까."
영화 속에 몇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바로 갱스터의 어원에 관한 것이다. 갱스터의 어원은 'Free Man'이라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이기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살인면허를 받은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그 단체는 지금까지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것이 관광과 자원대국 인도네시아의 뒤에 가려진 본모습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과거의 학살자들을 직접 캐스팅해 그가 자신의 범죄를 재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기존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다큐멘터리다. 이런 대담한 시도 자체가 경이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 든 학살자들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들이 실제로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곧잘 잊어버린다. 영화는 그 망각에 대해 굳이 질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 또한 참 영리한 전략이다.
영화의 감독 조슈아는 미국인이고 이 영화는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합작 영화다. 한 마디로 외부의 시선으로 인도네시아 대학살 47년 후를 그린 것인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감독이 서양인이라는 게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인물의 표정과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에 공동감독 한 명을 포함해 49명의 스태프들의 이름이 익명(Anonymous)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영화에 대해 제작진이 느끼고 있는 공포와 부담감을 짐작할 수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가디언, LA위클리가 2013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고,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95%라는 경이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이 영화의 제작진에 대한 타당한 예우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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