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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패러독스>의 원제는 Predestination 으로 '숙명'이라는 뜻입니다. 여자이자 남자이고,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딸이자 아들이고, 부모이자 자식이며, 시작이자 끝인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숙명'이라는 제목도 그럴 듯하고 한국 개봉 제목인 '타임 패러독스'도 플롯의 메카니즘을 함축하고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단편 소설 [All You Zombies]를 각색한 것입니다. SF 대가로 칭송받는 하인라인은 이 소설을 1958년 7월 11일 단 하룻 동안에 썼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전작 [By His Bootstraps]에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쓴 작품입니다.
영화는 하인라인의 소설을 충실하게 그대로 옮겼습니다. 1970년 바텐더와 미혼모의 대화로 시작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타임머신으로 이동한 뒤부터는 영화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만큼 놀라운 반전을 거듭합니다.
초반에 미혼모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아이를 낳고 나서 자신이 자웅동체임을 알게 됩니다. 자웅동체는 인터섹슈얼이라고 하는데 현실에서도 2000명 중 1명 꼴로 태어날 정도로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갖고 있다가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퇴화하는 게 대부분인데 그때 스스로 생식기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자인 줄 알았다가 여자가 되고, 여자인 줄 알았다가 남자가 되어 성적 인지 불일치를 경험해 쇼킹 상태가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태어날 때 아이가 두 개의 생식기를 가진 경우 의사들이 부모에게 하나를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2000명당 한 명 꼴로 태어날 정도로 흔하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인터섹슈얼을 자주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소설과 영화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와 인터섹슈얼을 결합해 상당히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인터섹슈얼이 등장하면 일단 자극적이기 때문에 소재주의로 흐르기 쉬운데 오히려 이것이 동양의 윤회사상과 닮은 타임 패러독스를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한 비장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타임 패러독스는 시간여행을 하면 역사가 바뀌기 때문에 애초에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역설이죠. 로버트 하인라인은 이 분야의 개척자입니다. 할리우드에서는 1980년대 들어 <백 투더 퓨쳐>와 [환상특급] 등이 만들어지며 타임 패러독스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하인라인은 이미 1940년대부터 이런 소재로 소설을 썼습니다. 1940년대에 세계는 한창 전쟁중이었지만 한편에선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으로 정말로 시간이 휘어지는지, 그렇다면 시간여행도 가능하지 않을지 과학적 검증이 한창이던 때였죠.
영화 초반에 바텐더가 미혼모에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묻자 미혼모가 "언제나 수컷이 먼저"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여자가 남자를 만난 게 시작인지 남자가 여자를 만난 게 먼저인지 궁금하다면 이 대화를 상기하면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호주의 스피어리그 형제 감독을 처음 알게 됐는데 차기작이 기대됩니다. 에단 호크의 연기도 좋았지만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연기한 사라 스눅이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제목이 [All You Zombies]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 주인공의 대사에서 밝혀지는데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들 좀비들은 어디서 왔는지 알기나 해?" 여기서 좀비들은 근원을 모르는 모든 인간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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