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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주>를 본지 며칠 지났지만 몇몇 장면들이 계속 떠오른다. 강렬한 영화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더 놀랐다. 2005년 밀양에서 있었던 실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1년에 걸쳐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영화와 조금 다르지만 44명이라는 숫자는 같다. 44명의 고릴라들은 소년부로 송치됐거나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공소권 없음으로 풀려났다. 전과자는 없다. 전과자가 없다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는 말인가? 44명 중 일부는 졸업 후 대학에 갔고 일부는 취업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우리 중 익명의 누군가로 살고 있다. 그들 중 죄의 댓가를 치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법체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영화가 만들어진 지금 한공주는 20대 중반이 됐을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를 보았을까? 제3자가 보기에도 끔찍한데 본인은 과연 볼 수 있었을까? 가만,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이수진 감독은 영화로 만들기 전에 본인에게 귀띰이라도 해줬을까?



천우희의 표정은 좋다. 순진하면서도 억울해 보이는, 상처 깊은 소녀를 잘 살려냈다. 김소영은 많은 장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발견이라고 할만큼 매력적이고, 아역 배우였던 정인선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얼굴을 가졌다. 그녀는 <경주>에서도 비슷하게 천진난만한 관광안내소 직원을 연기한다.


영화는 미스터리 구조로 되어 있다. 한공주(천우희)는 선생을 따라 다른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며 낯선 환경에 적응해간다.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그 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자꾸만 그녀 뒤를 따라다닌다. 머리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몸이 기억한다. 그럴 때마다 공주는 움츠러든다. 철조망을 치고 그녀 안에 숨으려 한다.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른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그녀가 쌀쌀맞지만 애절하게 노래 부르는 실력을 가졌다며 부러워한다. 함께 살게 된 선생의 엄마는 그녀가 일 잘한다며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면 그녀를 떠나갈 것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술만 마시고 엄마는 그녀를 모르는 학생 취급한다. 치료를 위해 산부인과에 가서도 그녀는 요청했던 여자 의사 대신 남자 의사와 마주쳐야 한다. 이 사회는 깊은 상처를 가진 피해자에게 무감각하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 사회다. 가해자의 부모들이 학교로 쳐들어와 한공주에게 탄원서를 취하해달라는 서류를 내민다. 후안무치한 상황에 학생도, 선생도, 학교도 침묵할 뿐이다. 그래서 한공주는 묻는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감각과 도덕이 마비된 사회에 태어나서 뻔뻔해지지 못한 것이 그녀의 죄라면 죄다. 악한 자들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다. 이처럼 아픈 영화가, 기왕 만들어진 바에야, 사회고발의 순기능을 하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라도 마련됐으면 한다. 단지 아름다운 영상미와 잘 쓰인 플롯에 감탄하기에는, 예쁜 화면과 해맑은 소녀 연기자들이 드러내고 있는 소재 자체가 너무 아프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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