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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검정색으로 만들어진 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무대. 일명 월드 스테이지. 무대 위 플레이어들이 어린 아이만큼 작아 보이지만 멜빵처럼 무대 양옆을 가득 채운 스피커들에서 터져나오는 파워풀한 사운드가 무대를 빈틈없이 꽉꽉 눌러 채우는 곳무대 앞으로 다가가자 드럼 소리가 땅을 때린다. 장맛비에 진흙밭이 된 땅을 타고 내 몸으로 올라와 심장을 펌프질한다. 쿵쿵쿵쿵. 가슴에 손을 대자 강렬한 비트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 새로운 비트에 맞춰 심장에서 만들어진 피가 동맥을 타고 나간다. 어떤 새로운 녹음기술도 이 음향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으리라. 산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 스피커에서 터져나오는 록 음악과 팬들의 함성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일체의 잡음 없이. 아니, 잔디밭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듣는 이들의 잡담도 모두 현장음이 된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무더운 공기 속에 음악만이 남아 있는 이곳. 음악이 좋아 모인 젊은 남녀들의 거대한 캠핑장 같은 이곳.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와이드스크린을 단 극장처럼 펼쳐져 있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듯한 록의 천국. 비록 하루 동안이었지만 왜 요즘 한국 여름은 록 페스티벌의 시즌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플라시보! 플라시보! 플라시보!"

팬들이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자 다섯 명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원래 멤버인 보컬, 베이스, 드러머에 이어 바이올린과 키보드를 치는 여자와 기타리스트 남자까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팬들의 떼창이 시작됐다. 거대한 무대에 어울리는 꽉 찬 사운드. 난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음악이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생생하게 가슴으로 들렸다. 몸은 기억한다, 좋은 음악을. 눈을 뜨자 어느새 나는 음악에 맞춰 두 손을 들고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가만히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 홀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여자, 노래를 따라부르는 외국인, 그 와중에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두 여자 친구, 발을 구르며 뛰는 사람들. 모두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섹시한 드러머가 화면에 나올 때마다 여자들은 환호성을 질러댔고 보컬은 연신 기분좋은 표정으로 땡큐를 연발했다. 그들에게도 지산은 잊을 수 없는 밤이었으리라.


비가 퍼붓다가 햇볕이 내리쬐다가 변덕스런 날씨 덕분에 잔디밭은 질퍽거렸다. 사람들이 뛰어노는 무대 앞에선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는데 소똥 냄새 같기도 한 그것은 사람들이 진흙이 된 잔디밭을 계속 뛰며 밟다보니 바닥에 있던 물이 올라오며 나는 냄새였다. 그러나 냄새 때문에 록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제대로 놀아보자' 라고 생각했으면 일단 몸이 움직여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손을 흔들고 머리를 흔들고 발을 굴러야 한다. 그래야 아드레날린이 솟아오르면서 마음까지 따라 움직인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함께 날아간다.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여, 일단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러라.



해리 빅 버튼, 디어후프, 노브레인, 댄디 워홀스, 델리 스파이스, 플라시보...


이곳에서 공연이 끝나면 다른 공연장에서 또다른 공연이 이어진다. 록 페스티벌의 매력은 이처럼 끊이지 않게 공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디어후프 여자 보컬의 귀여운(?) 뒷다리춤을 보다가 러브 스테이지로 가면 에브리 싱글 데이가 몽환적인 사운드를 연주하고 있다. 다시 월드 스테이지로 돌아오니 노브레인이 사운드체크를 하는 중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해맑기만 하다. 드디어 무대에 올라온 노브레인 보컬 이성우. 양팔에 새긴 문신을 드러내며 그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관객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병풍탈출을 선언한 황현성은 깡소주를 마시고 팩소주를 관객들에 던져주는 퍼포먼스와 함께 '소주 한잔'을 부른다.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공연.



점점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무대의 조명이 산 위에 달처럼 뜬다. 이름이 낯설었던 댄디 워홀스의 그러나 멋진 무대를 본 뒤 집에 갈 교통편이 걱정돼 셔틀버스를 예약하고 돌아오니 피스 스테이지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 익숙한 노래는 분명 델리 스파이스다.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델리 스파이스는 실망시키지 않고 그들의 대표곡을 들려주었다. 차우차우 앵콜곡까지. 보컬 김민규가 부러워할 정도로 사람들은 신나게 춤을 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뿌리며 무자비하게 놀기까지 했다. 공연장 한가운데서 물을 뿌리는 사람은 본인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정작 맞은 사람은 애매한 상황이 된다. 이미 음악에 흠뻑 젖어 있는데 물을 맞고 나면 리듬이 깨지면서 정신이 온통 물에만 집중되는 것. 공연에 취해 물 뿌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제했으면 좋겠다.


델리 스파이스 공연이 끝나마자마 피스 스테이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 대이동 한가운데서 진흙을 밟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결국 다리에 다 튀고 말았다. 플라시보가 이 정도인데 작년 라디오헤드 대이동은 과연 어땠을까?



펜타포트, 지산, 안산, 슈퍼소닉 등 한국의 여름은 '락페'의 계절이다. 한때 국제영화제가 범람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한여름 불볕더위를 록 음악과 함께 날려보내고 있다. 한국의 다른 공연장들처럼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많고, 젊은 남녀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군데군데 남녀들의 새로운 만남도 보이고, 한곳에 정갈하게 차려진 캠핑장에선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질지 12시에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온 나는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산은 에너지의 용광로라는 것. 산으로 막힌 분지 같은 잔디밭에 발을 구르게 하는 드럼 비트가 끊이지 않는 곳. 그곳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먹고 눕고 이야기하고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에너지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 에너지를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좋겠다.




PS) 입장 시 보안검색에서 음식물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은 문제란 생각. 1리터 물 페트병도, 과자 하나도 못 가지고 들어가게 하는데, 내부의 협찬사 제품만 비싸게 사 먹으라는 말로 들려 씁쓸했다. 물론 협찬을 못 받으면 이렇게 화려한 라인업을 유지하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통제는 야박하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관객들은 자기 방식대로 즐길 권리가 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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