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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윌 블룸(빌리 크루덥)은 쇠약해진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알버트 피니)을 찾아가 이렇게 하소연한다. 어릴적부터 동화 같은 모험담 늘어놓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사교적이어서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던 아버지. 하지만 정작 윌에게 아버지는 소통 불가능한 이방인이었다. 매번 말을 과장되게 늘어놓는 사람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한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


자기가 태어나던 날 금반지를 빼앗아갔다던 거대한 물고기 이야기를 그는 수천 번도 넘게 들었다. 눈을 보면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게 된다는 마녀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쫓아내려고 했던 거인 이야기, 지상낙원 같은 유령마을 이야기, 강 속에서 신비하게 헤엄치는 인어 이야기, 서커스를 운영하는 늑대인간 이야기, 꿈에 그리던 여자를 만나자 시간이 멈춘 연애 이야기, 중국인 샴쌍둥이 미녀를 꼬셔 탈출한 한국전쟁 이야기, 은행을 함께 턴 시인 이야기… 어릴 적에는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성인이 된 뒤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이 커진 나머지 그는 아버지가 평생 허황된 모험담 속에 빠져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그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될까봐 두렵다.

 

거인과 친구가 되는 에드워드


윌의 직업은 기자다. 기자는 팩트를 찾아내 스토리를 만드는 직업이다. 스토리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닮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다. 아들은 더 이상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아버지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아들이 서운하기만 하다.

결혼식에서 똑같은 레퍼토리를 늘어놓는 아버지가 지긋해져서 윌은 3년 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의도적으로 아들을 피했다. 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이방인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만삭의 아내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는 며느리 조세핀(마리옹 꼬띨라르)에게 모험담을 들려주고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푹 빠진 조세핀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윌은 진짜 아버지의 삶을 알기 위해 아버지 이야기들을 팩트체크하기 위해 나선다. 부자는 과연 마음의 벽을 허물고 화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잘 몰랐던 팀 버튼의 판타지

2003년 세상에 나온 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영화 ‘빅 피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와 딸 사이의 애틋함과 달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곧잘 긴장감이 흐른다. 어릴적 아버지를 우러러보던 아들은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를 극복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자주 갈등 관계가 형성된다. 두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때는 아버지가 노쇠했음을 서로가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작가 역시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영화는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낯익은 이방인이었던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감독의 상상력 가득한 산물이다.

영화의 원작은 1998년 다니엘 월레스가 쓴 동명 소설이다. 각본가 존 어거스트는 이 소설이 발매되기 전 미리 읽어보고 영화사 소니 픽처스에 판권 구입을 추천했다. 이 프로젝트는 원래 스티븐 스필버그가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이후 연출할 계획이었다. 스필버그는 잭 니콜슨을 에드워드 블룸 역할에 캐스팅하려 했다. 만약 스필버그와 니콜슨 버전의 ‘빅 피쉬'가 만들어졌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으로 방향을 돌렸고 '혹성탈출'(2001)을 막 끝낸 팀 버튼이 프로젝트를 물려받았다.

 

'빅 피쉬' 촬영현장의 팀 버튼


팀 버튼이 이 영화를 연출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부모님의 죽음이 있었다. 버튼의 아버지는 2000년 사망했고 2002년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가까웠던 적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은 그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병중에 있을 때 그는 연락하려 시도했고 영화에서처럼 화해할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그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 자신을 보는 듯한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아버지의 삶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가득 채우려는 듯 영화에는 그동안 버튼 영화에서 보아오던 캐릭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마녀에 너무 잘 어울리는 헬레나 본햄 카터와 서커스 단장으로 노예계약서를 들이미는 대니 드 비토는 팀 버튼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 캐릭터들이다. 에드워드는 외로운 거인과 친구가 되고, 미래를 보는 마녀의 마음을 얻고, 아무도 빠져나가지 않은 유토피아를 탈출하고, 물 속에서 유혹하는 인어를 쫓아가고, 첫눈에 반한 사랑을 얻기 위해 맹목적인 구애를 펼치는데 버튼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들의 여정을 닮은 이 모험들을 자신만의 특유한 판타지 세계관 안에 담아냈다.

 

마녀 역할의 헬레나 본햄 카터


각본을 쓴 어거스트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영화 속 윌 캐릭터는 그의 경험담이 고스란히 투영된 인물이다. 윌처럼 그 역시 저널리즘을 공부했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이방인 같았다"는 윌의 내레이션은 그가 아버지를 회상하며 만들어낸 문장이다.

 

 


포레스트 검프, 그리고 어바웃 타임

영화는 에드워드의 모험담과 이를 믿지 않던 아들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드워드가 자신을 큰 물고기에 비유하며 더 큰 강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면, 윌은 에드워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에드워드의 삶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 속 검프와 닮았다. 검프가 특유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미국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 한복판에서 영웅이 된 것처럼, 에드워드 역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전쟁과 미국 부흥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기를 헤쳐나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착한 사람이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프랭크 카프라식 이야기(1930~40년대 세계대전이 한창인 암울한 시기에 프랭크 카프라 영화들이 성공한 스토리 공식으로 할리우드가 아메리칸 드림을 전파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1990년대 ‘포레스트 검프'와 2000년대 ‘빅 피쉬'로 변주되었는데 시대가 달라진 만큼 두 영화 속 착한 주인공의 운명도 과거와 달라졌다. 즉, 2차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 호황기의 끝자락인 1990년대에 나온 ‘포레스트 검프’는 그동안 미국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회상하며 자축하는데 초점을 맞춘 반면, 시대가 바뀌어 모든 것의 의심이 시작된 초기 2000년대에 나온 ‘빅 피쉬'는 착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카프라식 신화에 거짓은 없는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묻고 있다.

 

그런데 착한 아버지의 모험담을 아들이 물려받는 영화는 10년 후에도 만들어졌다. 2013년작 영국영화 ‘어바웃 타임’에는 ‘빅 피쉬’와 전혀 다른 부자 관계가 등장한다.

‘어바웃 타임'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안 내력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그것은 평범한 하루를 살아낸 뒤 어제로 돌아가서 이번엔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다시 살아보는 것이다. 우리 일상은 놀라운 우연의 연속으로 가득 차 있고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깨닫는다.

 

영화 '어바웃 타임'


‘어바웃 타임’의 완벽한 부자 관계와 비교해보면 ‘빅 피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었고 어느 부분은 지어낸 이야기였는지 아들이 아무리 궁금해 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모험담 속에서 살았고 죽는 순간에도 아들에게 자신의 모험담 뒷부분을 지어내서 계속 이어가주기를 부탁했다. ‘어바웃 타임'의 아버지가 아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행복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기를 바랐다면, ‘빅 피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초라한 일상 대신 상상 속에서 더 나은 허구를 믿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윌은 아버지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어바웃 타임’의 아들은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반복해서 작별인사를 하며 기억에 오래 남을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빅 피쉬’의 부자에겐 그런 친밀한 감정 교감은 없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윌은 장례식에 찾아온 아버지의 모험담 속 인물들을 보면서 기막힌 모험담들이 대부분 진실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윌은 안도하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추억한다. 영화는 아버지의 모험담이 윌의 자식들에게도 전해져서 아버지가 이야기 속에서 불멸이 되었다는 윌의 내레이션으로 끝맺는다.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안고 강으로 가는 윌

 

에드워드는 그 자신은 모험으로 충만한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지 몰라도 아들에게는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에드워드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윌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어바웃 타임’에 비하면 ‘빅 피쉬'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아본 적 없는 아들이 만든 영화라는 티가 팍팍 난다. 상상이 행복의 도구라고 믿는 팀 버튼은 영화에 현실에선 못 이룬 자신을 투영했다.

 

영화에서 윌이 자신이 태어나던 날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베넷 박사(로버트 귈럼)는 그날 병원에서 윌이 태어나던 순간을 무미건조하게 말해준다. 그러면서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허구가 더 낫다”고 덧붙인다. 이는 이 영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환상적인 허구가 만들어내는 행복의 순간은 잠시일 뿐 허무함만 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초라한 진실을 피해 가상현실 메타버스 속에서 살아가려 한다. 누군가 메타버스 속에서 경험한 갖가지 모험담들을 실제 자신이 겪은 것처럼 늘어놓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험담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 블룸을 추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에드워드가 늘어놓은 모험담은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오래된 기억은 곧잘 미화되고 곡해되기 마련이어서 진실과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겪었던 사람들은 그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인생을 구성했던 모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영화는 이 장면을 마치 ‘진실게임'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너무 단편적인 해석이다. 이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 속엔 어느 정도 에드워드가 살아있다. 그 기억의 조각들이 아버지라는 한 사람을 구성한다. 윌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거기 그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비로소 기억의 퍼즐로 아버지를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빅 피쉬’는 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던, 하지만 뒤늦게 알고 싶어했던, 상상력 풍부한 예술가가 남긴 판타지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는 낯익은 이방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BBB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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