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500만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멕시코에서 멕시코인 스태프와 배우들만 데리고 만든 135분짜리 작은 영화 ‘로마’. 그러나 성과는 눈부시다. 타임 매거진은 이 영화를 2018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다. 골든글로브는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올렸고, 아카데미에서도 유력 부문 후보에 오를 것이 확실시된다. 지난 8월 베니스영화제는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심사위원 만장일치 황금사자상을 주었다. 이 영화를 투자, 배급한 덕분에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까지 하다.
지난 12월 12일 국내 개봉한 뒤 14일부터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게 된 ‘로마’는 과연 어떤 영화인지 자세하게 살펴보자.
1970년대초 멕시코시티의 로마가 배경
로마라는 제목에서 이탈리아의 수도를 떠올릴 관객이 많겠지만, 영화의 배경은 멕시코시티 중심가의 로마라는 지역이다. 이탈리아 로마가 관광도시인 것처럼 멕시코시티의 로마도 관광객이 몰리는 힙스터들의 지역이다. 하지만 1970년대 로마는 지금과 달리 개발이 한창인 곳이었다. 판자촌과 휘황찬란한 시내가 뒤섞여 있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두 모습이 번갈아 가며 보여진다. 이같은 '대비'는 영화의 전략 중 하나다. 고통에 빠진 인물 뒤편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설레는 사랑의 다음엔 배신이 찾아오는 식이다.
1970년대초 멕시코는 호황 뒤 찾아온 혼란의 시기였다. 1968년 하계올림픽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으로 사회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학생들은 체 게바라 포스터를 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루이스 에체베리아 정권은 보안군과 우익 깡패를 동원해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사망자만 3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멕시코의 어두운 과거사 중 하나다(2000년대초 정권교체 후 비센테 폭스 정권에서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은 결국 법정에 선다).
영화에선 1971년 6월 10일 벌어진 ‘성체 축일 대학살’ 사건이 드라마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정권이 극우 테러단체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 매들)’를 동원해 참정권 보장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과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사건이다. 사망 11명, 부상 200여명, 실종 35명으로 공식 집계돼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비티'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영화가 끝나고 나면 '리보를 위하여'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리보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유년시절부터 함께 지낸 하녀 리보 로드리게스로 영화의 주인공 클레오의 실제 모델이다. 50여년 동안 감독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리보는 지난 8월 영화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 베니스영화제 시사회에서 감독과 함께 영화를 보며 모습을 드러냈다.
2013년 아들이 쓴 시나리오로 만든 '그래비티'로 전세계에서 찬사를 이끌어낸 쿠아론 감독은 차기작으로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든 내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준 하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나리오를 썼고 여기에 당시 시대 배경을 녹였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진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낸 감독은 고향 멕시코로 가서 연기가 처음인 비전문 배우들을 데리고 그들의 순수한 감정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연출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오롯이 멕시코인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해 촬영팀 전원을 멕시코 출신으로 꾸렸고, 스페인어와 원주민어로만 대사를 구성했다. 또 배우들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캐스팅했다. 소피아 역의 마리나 데 타비라를 제외한 모든 배우는 연기가 처음인 신인이다. 클레오 역할을 맡은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멕시코 와하카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발견했는데 감독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 리보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아파리시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낸시 가르시아를 친구 아델라 역으로 함께 캐스팅하기도 했다.
또 감독은 자신이 실제 살았던 집과 거리를 재현하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소파, TV, 전화기 등은 모두 당시 그의 집에 있던 것과 똑같은 제품을 구해온 것이다.
촬영은 본래 쿠아론의 단짝인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제작 기간이 길어지며 루베즈키가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아예 감독이 직접 촬영에 나섰다. 멕시코 출신이 아닌 촬영감독은 영화를 100%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직접 카메라까지 잡은 이유다.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여성영화
'로마'는 여성영화다. 감독은 유년 시절 자신을 돌봐준 여성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계속해서 대비를 이룬다. 남성성은 폭력적이고 비겁하게 그려지는 반면, 여성성은 포용하고 연대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의 여성이다. 하녀 클레오와 그녀의 고용주 소피아는 모두 남자에게 버림받고 방황한다.
클레오는 남자친구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페르민은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떠나버린다. 클레오는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가 보지만 페르민은 클레오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협박하며 쫓아보낸다.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는 출장이 잦다. 4명의 아이들에겐 아빠가 집에 귀가하는 것 자체가 선물일 정도다. 안토니오는 또다시 캐나다 퀘벡으로 출장을 떠난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가 이번엔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는 달아나는 두 남자 페르민과 안토니오를 검과 자동차로 상징한다. 페르민은 클레오 앞에서 남성 성기를 드러낸 채 샤워봉을 들고 화려한 검술을 뽐낸다. 안토니오는 포드 갤럭시 자동차를 행여 긁힐까봐 애지중지하며 운전한다. 검과 자동차가 상징하는 남성성은 이후 클레오와 소피아에 의해 뒤집힌다. 클레오는 일본 무술 사범의 자세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모두 실패할 때 홀로 흔들리지 않고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검이 없어도 강인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소피아는 투박한 갤럭시를 팔아버리고 집에 꼭 맞는 작은 차를 구입한다.
여성성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시대와 대비를 이룬다. 페르민에 의해 원치 않은 아이를 임신하고 사산까지 한 클레오는 남성성의 피해자이면서 시대의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가족처럼 뭉친다.
바다 신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수영을 못하는 클레오는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들어간다. 아이들을 구해줘 고맙다는 소피아에게 그녀는 "저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클레오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영화에서 암 진단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던 클레오는 파리 시내를 활보하며 죽음, 절망, 인생에 대해 사람들과 토론했다. 그녀는 “나는 예쁘니까 살아 있다”고 말하면서 파리 시민들이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미러링했는데 그 때문에 이 영화는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간주된다.
영화 ‘로마’에서 클레오는 소피아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면서도 빨래를 널고 개똥을 치우고 음식을 만드는 일상노동을 반복하는데 이는 감독이 세상의 모든 ‘클레오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장면이다.
절제미 영상 속 풍부한 ASMR 사운드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등 단순한 이야기를 단단하게 벼리는 쿠아론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로마'에서 절정에 달한다.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마지막에 감동의 고갱이를 끌어내는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할 정도로 간단하다. 스타일도 단촐해서 영상은 흑백이고 배경음악도 없다.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순간이 많고, 의미 없어 보이는 노동을 롱테이크로 오랫동안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생략한 만큼 더 돋보이게 된 것이 있다. 플롯과 음악과 컬러를 없앤 대신 강조한 것은 풍부한 음향과 공들인 장면의 생생함이다.
우선 영화는 멕시코시티를 고스란히 재현할 소리를 담기 위해 수많은 사운드 소스를 채집했다. 거리 소음, 풀벌레 소리, 시위현장 등 소위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 사운드의 분량이 여느 영화의 6배에 달한다. 촬영은 롱쇼트 위주로 이루어져 있고, 전면과 후면에서 각각 다른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기에 사운드 역시 전면과 후면을 마치 레이어를 쌓는 것처럼 구성했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치 1970년대 멕시코시티에 와 있는 듯한 현장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다. 돌비 애트모스로 제작돼 이를 지원하는 환경에서 최적의 사운드를 체험할 수 있다.
절제미학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화면 역시 레이어로 구성돼 있다. 전면에 슬픔이 지배하는 순간, 후면에서는 축제가 벌어진다. 페르민에게 버림받고 돌아서는 클레오의 뒤편에선 인간 포탄을 쏘는 서커스가 펼쳐지고, 소피아와 아이들이 아빠의 부재를 슬퍼하는 순간, 뒤에서는 시끌벅적한 결혼식이 한창이다.
인생의 대비와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이같은 기법은 비단 롱쇼트 장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패닝, 틸팅, 트래킹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인물은 중요한 결심을 하거나 고비를 맞는다. 영화가 수평과 수직 움직임으로 카메라에 제약을 가한 것은 시대의 답답함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감독이 전작 ‘그래비티’에서 카메라가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도록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로마'에 가한 집착적 카메라 제약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다. 멕시코시티의 거리에서, 바닷가에서 트래킹 쇼트가 펼쳐질 때 클레오는 화면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려는 것만 같고, 카메라는 그런 클레오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붙잡는다.
‘로마’는 1970년대초 멕시코를 재현하기 위해 장인정신이라고 할만큼 대단한 정성을 들인 영화다. 인물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뒤 분출시키는 마지막 순간으로 끌고가는 영화기도 하다. 이별, 죽음의 징조 등 상징은 직설적이어서 눈에 보이지만 효과는 매우 단단하다. 플롯이 단순해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은 실망하겠지만, 클레오의 감정에 몰입하며 영화를 본다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로마 ★★★★
생략의 미학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여성들의 연대.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