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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한껏 기대를 부풀려 놓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그런 영화입니다. 췌장을 먹고 싶다니, 대체 무슨 상황이지? 고어영화인가?


그런데 고어영화라고 해도 이 정도 제목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입니다. 신체절단과 피범벅의 고어영화는 <피의 향연> <카니발 홀로코스트> <호스텔>처럼 주로 점잖은(?) 제목이 대부분이거든요.



순정만화 느낌으로 만들어진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잠시 뒤통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벚꽃 흩날리는 로맨틱한 분위기와 “췌장을 먹고 싶다”는 말이 도무지 연결이 안 되는데 그래서 더 궁금합니다. 이런 언밸런스한 반전 매력이라니요. 기대감이 치솟습니다. 아마도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제목상’ 같은 게 있다면 단연 이 영화에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떡밥도 이런 떡밥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영화는 제목값을 할까요?



츠키카와 쇼 감독은 영화의 제목에 대해 새로운 사랑고백의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문학작품 표현 중에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군요'라고 조심스럽게 바꾸어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현대판 'I love you'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츠키카와 쇼 감독


영화에는 동명 원작 소설이 있습니다. 스미노 요류의 소설은 일본에서 250만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였고, 만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소설은 소년과 소녀의 고교 시절을 그리지만 영화는 12년 후 교사가 된 하루키를 보여주며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영화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소녀 사쿠라(하마베 미나미)가 하루키(기타무라 타쿠미)라는 소심한 소년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학교 교사가 된 하루키(오구리 슌)는 도서관에서 책 정리 작업을 맡게 되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이 학창 시절에 정리해둔 목록표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는 회상에 잠깁니다.


12년 전 하루키에겐 도서관에서 함께 책 정리 작업을 하던 사쿠라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갑작스럽게 소년의 삶에 다가왔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꺼리고 늘 혼자이던 하루키는 반에서 왕따로 지내고 있었는데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이것저것 같이 하자고 조릅니다. 우유부단한 소년은 소녀에게 끌려다니지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엽니다. 그렇다면 소녀는 왜 소년에게 대시한 것일까요?



사쿠라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소녀입니다. 그녀는 예쁘고 밝고 명랑합니다. 하지만 사쿠라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습니다. 췌장이 아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픈 부위를 먹으면 병이 낫는단다.” 그녀는 내장탕을 같이 먹어줄 친구를 찾습니다. 절친 교코(기타카와 게이코)는 너무 감상적이어서 아프다고 털어놓으면 내내 울기만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믿음직한 사람, 기왕이면 잘 생긴 남자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그녀가 췌장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니 입이 무거운 사람이면 더 좋겠고요.


병원에서 일기장을 떨어뜨렸는데 그걸 주워준 같은 반 남자애가 있습니다. 이름은 하루키. 평소 존재감이 없던 친구였는데 그를 보자마자 딱 이 친구라는 직감이 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접근합니다. 너는 내 병을 알았으니 나랑 같이 내장을 먹으러 다녀야 된다며 막무가내로 덤빕니다.



마침 하루키는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는 작업을 맡고 있었는데 사쿠라는 그 일에 자원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분류하고 내장탕을 먹으러 다니고 여행도 떠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서히 친구가 됩니다.


소녀에게 "췌장을 먹는다"는 말은 비밀을 공유할만큼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내가 아픈 부위를 네가 먹음으로써 너의 몸 속에 내가 언제나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에게 "내가 죽으면 네가 내 췌장을 먹어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소년은 기겁을 하죠.




영화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걸작 <러브레터>(1995)의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도서관에서 인연이 시작되고 또 숨겨둔 메시지를 찾는 과정이 비슷하고, 또 죽은 연인을 통해 성장해가는 플롯도 닮았습니다. "오늘 아니면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쿠라의 모습은 시한부인생을 그린 영화 특유의 용기를 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아쉽습니다. 하루키는 뻣뻣하고 사쿠라는 능글맞는 설정으로 초지일관하는데 영화 초반부엔 두 사람의 관계가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풋풋하긴 하지만 그뿐이죠. 상상력에 제약을 가하는 직접적인 대사들도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아무렴 <러브레터> 같은 완성도는 쉽지 않겠죠.


하지만 눈높이를 살짝 낮추고, 초반부의 닭살스런 대사들을 견디고 나면, 영화의 후반부는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사쿠라가 남긴 편지 덕분에 여러 오해들이 풀리면서 하루키는 첫사랑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처럼 그의 몸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입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췌장에 남아 있는 첫사랑의 흔적. 제목이 다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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