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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인칭 슈팅 게임을 하는 듯한 액션 시퀀스로 시작한다. 건물에 잠입한 킬러는 처음엔 총으로, 나중엔 칼을 들고 건장한 남자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간다. “혼자 왔어? 여자가 겁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근육질 남자는 당연히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죽는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는 인물 밖으로 빠져나와 처음으로 3인칭 시점이 된다. 검은색 재킷을 입은 숙희(김옥빈)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수많은 남자들을 가볍게 처단하고 마침내 보스의 목을 헬스장의 줄넘기 줄로 감은 뒤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목적을 달성한 숙희의 얼굴은 핏물로 얼룩져 있다. 경찰차가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숙희는 오늘만 산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본다. 그 위로 타이틀이 뜬다. ‘악녀’



사실 영화의 제목은 내용과 별 관계가 없다. 악녀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만 차용할 뿐 영화는 선악 탐구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 속 세상은 게임 속 세상처럼 비현실적이다. 숙희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으로 설정돼 있지만 이는 실제 그들의 삶을 다루겠다는 것보다는 무자비한 인간형의 스테레오타입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배역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니까. 따라서 숙희가 수십 명을 거뜬히 죽이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그저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숙희를 킬러로 만든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연변 조직 보스 신하균, 또 하나는 국정원 요원 김서형. 양쪽을 오가던 숙희는 의외로 두 사람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악녀>의 매력은 볼거리로서의 영화 그 자체에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액션 장면은 힘이 넘친다. 도입부 1인칭 시점 대학살 액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는 도로 액션, 달리는 차와 좁은 마을버스 안을 넘나드는 살육 액션 등 날것으로서의 시각적 쾌감이 상당하다. 컴퓨터그래픽 없이 스턴트맨을 동원해 촬영한 아날로그 액션 장면들은 숙련된 장인의 솜씨다.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은 벽을 타고, 구르고, 찌르고, 뛰어 넘고, 본네트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대담하게 총을 쏘는데 기존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고난도 액션을 놀랍도록 강렬하게 해낸다.



하지만 액션에 비해 스토리는 많이 아쉽다. <악녀>처럼 액션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액션과 액션 사이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돕기 위한 정도로만 스토리를 만들어가면 되는데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 이야기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 꼬아버린데다 그 이야기라는 것도 클리셰 덩어리다.


기관에서 킬러로 훈육되는 여성과 그에게 다가온 연인이 알고보니 감시자였다는 설정은 <니키타>(1990), 살인병기로 길러지는 여성들이 단체생활을 한다는 설정은 <네이키드 웨폰>(2002), 딸이 자라서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킬빌>(2003), 신분을 위장하고 숨어 사는 여성은 <팜므 파탈>(2002), 마음 잡고 살아보려 하는데 자꾸만 일이 꼬이는 설정은 <영웅본색>(1986) 등 레퍼런스도 다양하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드물다. <악녀>가 자랑하는 액션 장면만 해도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이미 다른 영화가 시도한 것들을 비슷하게 해낸 정도다. 예를 들어, 1인칭 시점샷으로 진행되는 도입부는 <하드코어 헨리>(2015), 오토바이 칼 격투신은 <블랙 레인>(1989),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스나이퍼 총을 쏘는 모습은 <킬빌>, 비슷한 사물을 통해 화면을 전환하는 기법은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사실 ‘악녀’라는 제목도 오리지널은 아니다. <하녀>, <화녀> 등을 만든 한국 컬트영화의 대부 김기영 감독이 별세하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시나리오의 제목이 ‘악녀’였다. 1970년대 서울로 올라온 시골 처녀가 산부인과에 취업해 병원장 부부와 삼각관계를 벌이는 내용이었다. 김기영 영화답게 계급 문제, 섹슈얼리티 문제가 파격적인 구도 안에 녹아 있었다. 한국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악녀'라는 제목을 가져다 쓸 땐 당연히 김기영 감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김기영 감독 특유의 주제의식과 관계없다. 이번에도 그 이미지만 차용한 셈이다.


이처럼 액션 장면과 제목에까지 클리셰가 넘치는데 스토리까지 짜깁기를 남발했으니 영화가 매끄러울 리 없다. 숙희가 사회로 나와 현수(성준)를 만나는 장면부터 영화의 분위기는 급변하고 감정선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특히 현수가 숙희에게 접근하면서 나누는 대사는 손발이 오글거려 감독에게 제발 로맨스에서 손 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복잡한 캐릭터들의 관계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분량이 꽤 길어서 지루하다. 차라리 스토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킬빌>처럼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살인범이다>로 호평 받은 정병길 감독이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두번째 영화 <악녀>는 한국영화에 기념비적인 액션을 시도했고, 또 그 액션을 여성 원톱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영화다. 김옥빈은 제작 과정의 피 땀 눈물이 눈에 선할 정도로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 유의미함을 영화는 맥락없는 드라마로 반감시켜버린다. 여성 원톱이라는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어느 부분에도 주인공이 여성이어야 하는 이유가 잘 느껴지지 않아 아쉽다.


악녀 ★★☆

드라마는 심각한 무리수. 액션신만 모아 보면 걸작.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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