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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선과 악이 대결하는 장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며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진 능력자가 나타나 세상의 불합리함을 깔끔하게 정리해주길 바란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반세기 전 만화책 속에 살던 슈퍼히어로들은 21세기 난제들을 해치워주길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을 등에 업고 부활했다. 돌연변이 인간, 돈 많은 과학자, 신, 외계인 등 출생의 비밀도 다양한 그들은 어느새 족보를 따지기 힘들만큼 숫자가 늘었고, 어벤져스, 저스티스 리그 등 팀을 이뤄 싸우기도 한다.



원더우먼은 지금까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았던 슈퍼히어로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캐릭터일 것이다. 성조기 무늬로 만든 밀착 유니폼을 입고 한 손에는 채찍을 든 모습이 트레이드마크다. 나이 든 팬들에겐 청순한 린다 카터가 주연한 미국 드라마로 더 기억에 남아 있을 듯하다. "날으는~ 원더우먼"으로 시작하는, 진미령이 부른 주제가도 한국에서 히트했다.


핀업걸처럼 노출이 많아 아슬아슬한 의상은 성 상품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원더우먼은 배트맨, 슈퍼맨 등 근육질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를 누렸다. 1941년 원더우먼 캐릭터를 처음 만든 윌리엄 몰튼 마스턴의 생각은 만화 속 세상을 남성 슈퍼히어로들의 지배 하에 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다. 당대의 페미니스트들과 두루 교류했던 그는 원더우먼을 만들 때 전설적 여성 운동가들을 참조했다. 산아제한 운동가 마가렛 생어,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운 에멀린 팽크허스트, 최저 임금 운동가 플로렌스 켈리, 그리고 마스턴의 아내이자 여성 운동가 세이디 할러웨이 등이 원더우먼 캐릭터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76년만에 사상 최초의 실사영화로 돌아온 원더우먼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는 원더우먼이 성 상품화로 비치는 것만큼이나 페미니스트들의 한풀이로 비추어지는 것도 경계했다. 그는 원더우먼 특유의 의상 컨셉트를 유지하되 노출을 살짝 줄여 융합을 시도한다. 지덕체에 미모와 모성애까지 모든 것을 갖춘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낸 뒤 그를 남성과 팀을 이뤄 싸우게 한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7년 슈퍼히어로들의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배트맨과 슈퍼맨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물으며 고뇌에 빠졌다가 헤어나오기를 반복했고, 어벤져스 군단은 주도권을 놓고 한바탕 내전을 벌였다. 또 갑자기 나타난 안티히어로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히어로들이 너무 나이브하다며 비웃는다. 이처럼 슈퍼히어로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혼전 양상이다.


갤 가돗이 연기한 새로운 원더우먼은 슈퍼히어로 초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려 한다. 아마존에서 온 반인반신 다이애나 프린스는 착한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하겠다는 열정으로 충만하다. 그는 천성이 긍정적이어서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고, 호기심이 많고, 결단력이 강하고, 머리가 뛰어나고, 몸집이 크고 다리가 길어 싸울 때도 우아하다. 그는 자신이 선의 대변자라고 믿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데미스키라 왕국의 여왕인 그의 엄마 히폴리타(코니 닐슨)는 인간을 구원하러 가겠다는 다이애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그들에게 과분해."



다이애나는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전쟁의 신 아레스가 인간을 조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레스를 죽이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의 무조건적인 순수함은 위험해 보일 때도 있는데 이때 그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인간이자 남성인 스티브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다. 다이애나는 스티브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비로소 원더우먼으로 거듭난다. <니키타>, <제5원소>, <악녀> 등 많은 여성 주연 액션 영화들처럼 원더우먼이 싸우는 이유 역시 결국 사랑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런던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군사령관 회의에 들이닥쳐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스티브가 꾸린 남자들로 조직된 팀을 리드한다. 그는 마침내 악독한 독일군 대장 루덴도르프(대니 휴스톤)를 처치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다이애나는 어리둥절해하며 묻는다. "아레스을 죽였는데 왜 전쟁이 멈추지 않죠?"



다이애나를 제외한 관객 모두는 답을 알고 있다. 스티브가 애써 감추고 싶은 진실을 말해준다. "인간이 당신 기대만큼 선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선의 대변자로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하고자 먼 길을 온 원더우먼은 인간을 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딜레마에 빠진다.


이제 다이애나는 인간을 알아버렸다. 그중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여성 슈퍼히어로를 단독으로 내세운 첫 영화 <원더우먼>은 이처럼 인간 세계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 이유를 질문함으로써 기존 슈퍼히어로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어지럽혀진 슈퍼히어로 월드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켜 초심을 떠올리게 한다. 원더우먼은 뒤늦게 합류했지만 누구보다 선한 의지와 추진력을 갖추고 있어 향후 저스티스 리그의 리더로까지 성장할 자질까지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블랙 위도우, 캣 우먼, 스톰 등 지금까지 선보인 슈퍼히어로들 중 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단독으로 존재감을 드러내 판도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다르다. 그는 첫 등장부터 출신을 분명하게 밝혔고,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는지 그 과정을 명확히 했고, 또 능력으로 의지를 증명했다. 과거 반짝이 의상을 입은 예쁜 여전사는 이처럼 특출나게 완벽한 여신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 영화 이후 원더우먼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원더우먼 ★★★★

돌아온 아마존 전사. 그 우아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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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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